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원영 May 17. 2023

엄마도 돌봄이 필요하다

나도 필요하다!

온갖 육아 컨텐츠나 육아 상담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그만큼이나 아이 키우는 일이 중요하고 또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느냐에 대한 컨텐츠에 비해 아이를 돌보는 주체인 양육자를 돌보는 컨텐츠는 터무니없이 적다. 기껏해야 고충에 공감하고 힐링하는 정도랄까. 엄마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치유해야합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앞단에 '아이를 잘 키우려면 엄마가 스스로 돌아보며 노력해야 한다는 측면에서'가 생략되어 있다. 엄마는 자기 작업을 해도 아이와 떨어질 수가 없는건가, 이래서는 나를 위한게 아니라 육아를 잘 하는 기능인이 되기 위한 일같지 않나.

아이를 제 손으로 길러본 사람이라면 '나만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할 것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돌보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아이를 얼르고 달래는 일, 먹이고 치우는 가사일 등 단순한 차원에서만 육아를 바라보면 제대로 접근할 수 없다. 가부장제가 우세한 우리나라에서는 육아와 가사의 가치를 잘 쳐주지 않는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사일을 전담하면 노는 주부이고, 이를 비용으로 환산해도 높은 값이라 하기 어렵다. 말로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지만 현실에서는 '맞벌이할 수 있게 친정이나 시댁 도움이 있는 것도 스펙'이라는 말이 나온다. 출산은 물론이고 결혼도 거부하는 요즘 시대에 육아는 '운 좋고 돈 있으면 타인에게 위탁하는게 장땡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경험이 몸에 새겨지고 평생 지대한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일임을 알고 또 믿는 이들이 있다. 정말 잘 돌보기 위해 돌봄을 행하는 많은 엄마들이 있다. 나 역시 일을 뒤로 하고 그 길을 택했다. 후회는 없지만 힘듦은 있다. 직접 돌보지 않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지리멸렬하고 쪼잔스럽고 자괴감 밀려오는 종류의 힘듦이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어? 하는.

첫 아이를 키울 때는 정말 이상적인 육아를 해내서 내가 양육에 최적화된 '좋은 엄마'인 줄 알았다. 보통 사람보다 회복탄력성도 좋고 자기조절이 잘되는 편이었고 무엇보다 아이와 단단히 사랑에 빠져서 가능했다. 소위 독박육아를 했음에도 그랬다.  두 아이를 주말부부로 키우며 몸도 축나고 육아 외 스트레스까지 받다보니 착각이 와장창 깨졌다.

- 몸이 힘들면 다 소용없다. 신경줄도 얇아진다. 평소 괜찮던 일도 견디기 어려워진다.
- 요구적이면서 배려는 모자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일은 버겁다. 특히 엄마가 지쳐 있다면.

아, 남들 힘들다는걸 이제사 알았다. 오은영 박사님 좋아하지만 그 분이 24시간 육아를 했다면 '평생 아이에게 화낸 적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지고 볶으면서 화도 내고 울고 웃으며 부대끼는게 육아의 민낯이다. 돌봄 받아야할 대상은 엄마다. 그리하면 나머지는 절로 풀린다. 현장의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는 뻔한 사실이지만 넘쳐나는 육아 컨텐츠의 9할은 '엄마가 이렇게 저렇게 해야한다. 그래야 아이가 이렇게 저렇게 되고 안하면 나빠진다'는 식의 미션 뭉치다.

내가 날 알아야 남도 안다.
내가 날 이해해줘야 남도 이해해줄 수 있다.
내가 날 돌볼 줄 알아야 남도 살뜰히 돌봐진다.

그럼에도 나를 돌보는 부분은 쏙 빠지고 해야할 일 리스트만 쥐어주며 내달리게 하는 것 같다. 모르다가 알면야 당연히 신선하고 또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이 좋다. 하지만 실천은 별개다. 육아서는 책일 뿐이라고 좌절하는 이유는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도 힘들어서다. 내가 힘들면 아이를 담아줄 공간이 작아진다. 팔이 나를 보호하기 바빠 웅크려져 있어 아이를 안아줄 넉넉한 품이 되지 못한다.

돌봄은 어렵다. 하지만 스스로를 잘 돌봄으로써 아이 돌보는 일이 수월해질 수 있다. 힘들면 위탁해버리는 것으로 해결하기 좋은 세상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험상 위탁은 당장 편하긴 해도 나의 육아력(?)을 저하시켰다. 쉴 틈을 찾는 것은 좋으나 정작 나는 약해지고 품도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엄마 돌봄 컨텐츠도 넘쳐날 것이다. 자기사랑 자기돌봄 등이 유행이지 않나.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좋은 것을 먹고 운동하고 내 기분이 좋아지는 무언가를 하면서 나 자신을 돌봐주는 행위를 함께 하려는 코치들도 많다. 하지만 이는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 접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행위만 있는 땜빵식 처방이다. 물론 도움은 되지만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빠지거나 기타 삶의 여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런 방법을 쓸 여유가 없어지면 속수무책이다.

내 몸과 감정을 두루 살피고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나는 왜 이렇게 대처하는지, 내가 나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는 내적 요소가 무엇인지 등을 살피고 패턴을 바꿔나갈 때 진짜 돌봄이 시작된다.

돌봄의 프로세스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1. 불편
- 대상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불편감을 느끼고 이것이 여러 형태로 드러난다.

2. 대처
- 좌절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아 실행한다.

3. 안정
- 욕구가 충족되어 안정된다.

아기가 배가 고파서(불편) 울면 엄마는 이를 알아차리고 기저귀를 보거나 시간을 확인한다. 기저귀는 뽀송하고 시간이 제법 지나 배도 홀쭉하니 배고픈 줄을 안다. 밥을 먹이니(대처) 아기가 배고픔이 해소되어 울음을 그치고 방긋 웃는다(안정).

이 과정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능력은 다음과 같다.

1. 대상이 불편한지 아닌지를 알아차리기
2. 적절한 방법을 찾기
3. 안정된 상태를 알아보고 유지하기

배가 고파 우는 아기를 그저 안고 달랜다면 2번의 적절한 방법을 못 찾은 것이다. 평소 안정감이 있는 아기라면 배고픔이 해소되고 기분이 좋아 놀겠지만 평소에 욕구가 여러번 좌절되어 불안이 높아져있다면 밥을 먹고 만족했다 해도 곧 칭얼대거나 혼자 놀지 못하는 불안정 상태로 돌아간다. 3번은 평소 1,2번이 잘되어 있어야 잘 유지된다. 돌봄의 질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질을 높이기 위해 엄마 자신을 잘 돌봐야한다. 아이에게 충분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보다 사랑으로 잘 연결되기 위해서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전자는 '기능을 잘 해낸다'의 뉘앙스를 피할 수 없는 표현이나 후자는 서로 관계를 잘 맺는다는 상호성이 느껴져서다.

아무리 부드러운 말을 해도 결국 까놓고 보면 잘 하라고 채근하는 멘트는 엄마를 돌보는 일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책감이 더해지기도 하고 때로 숨도 막힌다. 아이와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맺고 싶어서, 서로 잘 통하고 눈 마주치면 많이 웃고 싶어서. 내적 동기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잘못할까봐 두려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돌보는 일에 돌봄 단계를 적용하면 내가 불편한지 편한지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이 시작이 몸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  각 단계에는 나를 돌보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다. 이를 살펴서 풀어내어 없애거나 작게 만들면 보다 온전한 내가 드러날 수 있다고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