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불편할 때 기억할 것

타인은 날 비추는 그림자다

by 박원영

왜 누군가와 있을 땐 편안하고, 다른 누군가와 있을 땐 불편한가. 왜 어떤 사람과 있을 때는 유난히 드라마가 써지는가?

이 사람에 대한 내 해석이 징검다리 건너듯 덤벙덤벙 뛰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경험으로 인해 경계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무의식 중에 안전치 않았던 누군가를 떠올려 그리 느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여러 컴플렉스로 인해 역린이 건드려져 해석이 과해질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열쇠는 '기억'에 있다. 특정 인물과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뇌가 어떤 기억을 참고자료로 들이미느냐에 따라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또 다른 열쇠는 내 '안전감의 베이스라인'이다. 기본적으로 위험을 더 감지하는 쪽으로 발달한 사람은 약간의 자극에도 바로 경고음을 울릴 수 있다.

이 둘은 상황, 상대, 몸의 컨디션 등에 따라 다채롭게 변주되어 나온다. 그래서 한 상황만을 보고 무어라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체로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나, 타인의 일관된 피드백을 보면 나의 <기본 상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나는 문제 없는데 타인에게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고 여길수록, 우주는 신기하게도 나에게 실마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 같다. 사실 우주의 신비나 도덕적 상벌이 아니라 당연한 심리적 역동이 현실에 드러났을 뿐이다.

남탓해버리는 투사는 내 취약점이 드러날 때의 불편함으로부터 날 지키기 위해 작동한다. 그래서 방어기제라 부른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외면하거나 없는 척 누를 때, <그림자 에너지>가 쌓인다. 이는 언젠가 터져나오게 마련이며, 결국 현실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한다. 마법적인 힘이 아니다. 내가 외면할래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국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정신의 작용이다.

이런 과정을 칼 융은 이그드라실 나무 아래 니드호그의 부름으로 은유했다.

융이 말한 이그드라실 나무는 의식·자아·사회적 정체성까지 포함한 전체 정신 구조의 은유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햇빛을 받는 가지와 줄기 쪽에 해당한다. 반면 니드호그는 그 나무의 뿌리를 갉아먹는 용으로 등장한다.

융의 언어로 옮기면, 억압된 기억, 처리되지 않은 감정, 인정받지 못한 욕구, 즉 그림자다.

이렇게 들으면 니드호그가 피해야 할 괴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니드호그가 나무를 해하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는 뿌리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이는 개인에게 끊임없는 불편한 감정, 일상에서의 갈등, 신경증적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적 역할에 집착해 자신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다움을 잃을 수도 있다.

니드호그는 이 나무가 나무답게, 개인이 개인답게 개성화의 길을 가게 하려고 허물을 벗으라 촉구한다. 성장을 위해 파괴를 부르는 힘이다.

불편감은 심리역동적으로 보자면, “여기에 아직 소화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니드호그의 부름이다 . 이 부름을 무시하면 정신은 다른 방식으로 균형을 맞춘다.

투사, 분열, 과잉 경계, 관계 드라마 같은 형태로.
그래서 그림자는 억눌러 없앨수록 조용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통해 말을 걸기 시작한다.
융이 말한 통합은 그림자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아, 이 기억과 감정이 여기에 있구나”라고
의식 위로 올리는 것이다. 타인에게 향한 투사 에너지를 거두어 들여 내가 충분히 느끼고 봐주어 과하게 붙은 의미와 힘을 빼어줄 필요가 있다.
계속 “왜 저 사람은 저럴까”라는 질문만 반복하면 늪에 빠진다. 이 질문은 나를 보호해주지만, 이해와 성장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과 있을 때 불편하다는 감각은 반드시 ‘피해야 할 신호’는 아니다.
때로는 내가 아직 다 소화하지 못한 기억이, 안전치 않은 경계 감각 안에서 활성화되었다는 알림이다. 이 신호를 해석으로만 소비하면 한 편의 사이코 드라마가 되고, 신호로 듣고 나를 돌아보면 자기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 사람은,
사실 내가 돌봐야 할 내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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