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한계
어딘가 미묘한 느낌의 꿈을 꾸고 깬 이른 아침. 누워서 인터넷을 보다가 우리 주변에 분명 있지만 별나라 이야기같기만 한 사연을 하나 보게 되었다. 사고 싶은 것은 많고 돈은 없어서 조건만남 어플을 통해 남자를 만났다가 무서워서 결국 도망쳤다는, 자괴감과 한탄 섞인 이십대 초반 여학생의 글이었다. 댓글은 위로와 안타까움, 질책 등 여러 반응이 섞여 있었고, 그것을 보는 나는 어떤 감정(연민이건 분노건)이 들기 보다는 테두리가 분명히 쳐진 창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연 속 사람이나 반응을 보인 사람이나 다 자기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일텐데, 그 안에서 판단과 감정이 일어나서 뭔가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게 갑자기 낯설게 다가왔다. 그녀를 토닥이는 것이 특별히 더 공감적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부분 공감하면 따뜻하고 알아주고 위로하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어쩌면 그녀가 느낄 참담함을 느끼고 우울해지는 쪽이 더 공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곳에서는 각자의 시각에서 위로나 도움을 준다는 명목 하에 온갖 조언이 난무하고 있었다.
나 역시 머리 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대학생이라면 등록금을 낸다는 것인데, 절대적 빈곤 상태가 아닌데 어째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일시적으로 충동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 폭력에 노출되어서 스스로를 막 대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던데 안타깝다... 그래도 좀 더 괴롭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마련할 수는 없나? 아니, 이것저것 해보다가 유혹에 넘어간 것인가... 등등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고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 성공은 했으나 다분히 나의 가치관 취향에 맞는 것을 고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아무리 좋은 의도의 말이라도 조언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겠다 싶어졌다. 여기에 '나라도 그랬을거야'는 없었다. 나는 혼란을 겪고 있는 그녀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사정을 다 모르고, 어떤 상황과 변수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게 좋겠다, 저래야 한다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건 그냥 내 에고의 자기만족적 잘난 척이고, 타인에게 영향력 있는 존재이고픈 갈망의 표출일 뿐이다. 나의 '취향'과 '판단'대로라면, 지금이라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맘을 단단히 먹고 심신 건강한 방법을 찾아 상황을 헤쳐나가길 기원한다 정도겠지만, 이 또한 그 사람의 창문으로 보면 자기 시야 밖의 풍경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그런 복잡한 심경과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인간 뇌세포에서 모방을 통해 공감케 하는 거울세포는, 상상의 힘을 발휘해서 인간을 소통하는 동물로 만들긴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창틀은 생각하지 않고, 내 창이 얼마나 견고하며 합리적인지를 주장하고 상대에게 내 창에 맞는 시야를 가지라는 식으로 들이민다.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다. 상대의 창으로 바라본 적도 없으면서 그 창에 대해 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해서 왈가왈부한다는 점에서 구업을 짓는 일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극단적인 사연을 보고 극명한 관점 차이가 드러났기에 이런 생각이나마 해본 것이지, 일상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단정짓기, 판단하기를 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끊임없이 판단하고 정의하고, 시비나 호오를 가르고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한 것일 뿐이면서 '바람직한 것','건강한 것','영적인 것','합리적인 것','도움을 주는 것' 등의 딱지를 붙이며 자기만족이나 하고 있다.
솔직히, 부끄러웠다.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조금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게 인간이고, 그 감정이나 사고로 인해 경험이 생기고 배움의 장이 펼쳐져 성장하게 됨을 알기에 위안을 받는다. 아마 평생 부끄럽고, 또 위안을 받을 것이다.
나는 글 속의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의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지 정말 공감해서 나온 진심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한 적도 없고, 돈이 없다 해도 다른 길을 찾지 성을 파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없다. 나는 진정으로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는 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냥 그럴 뿐이다.
내 가족, 친구, 지인 그 누구라도, 내가 그들과 정말 공감할 수 있는 창을 갖고 있을까 생각해봤다. 비슷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비슷한지 여부를 알 수 있을만큼의 정보조차 없다. 내 창과 네 창이 얼마나 유사한 풍경을 향해 열려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섣불리 공감 운운하며 들여다보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서운 일이다. 안 그래도 말수가 적은데 더 아껴야겠단 생각이 든다. 동시에 그래도 '창 맞춰보기'를 계속 해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갈거란 생각도 든다.
거리의 가늠. 거기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나에겐 이게 쉽지 않다. 어쩌면 "야! 창문 재봐! 헐? 나랑 완전 다르네?"하며, 웃고 떠들고 화도 내고 욕도 들으면서 맞춰가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상대가 헛짓을 했을 때 정색하고, 반대로 내가 헛짓을 해서 상대가 욕을 해도 잠깐 얼굴 붉히고 마는 단호함과 넉살 같은 것들이 필요할거다.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자유로이 잘 쓰진 못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억만장자의 해안가 저택의 뷰가 종종 등장한다. 거실에 통유리로 된 전면 창(그게 곡면이라 270도 경관을 다 보여주기도 하고)이 있어 보이는 풍경이 많다. 돈이 많아 집이 넓고, 거기 달린 창이 크면 작은 집에서 작은 창을 뚫고 사는 이들이 보는 풍경 여럿을 합쳐 놓은 것마냥 한번에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이 부자라면, 돈에 해당하는 것-아마도 사랑이나 지혜같은 것들-이 많아 마음의 집이 넓고 거기 달린 창이 크면, 그 창을 통해 보이는 것이 더 많을게다. 가슴으로 느끼며 공명할 부분도 더 많아, 상대적으로 더 넒게 품어낼 수 있을 것이고. 판단이나 증명, 조언의 영역이 아닌, 그렇다고 감상적으로 다 우쭈쭈하는 것이 아닌, 그저 보이기에 알고 토닥이게 되는 담담하지만 깊고 부드러운 영역이 펼쳐질게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이번 생에 될지는 모르겠다. 아마 수십번 더 살아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