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꾸만 상처를 재생할까
몇년 전 미술치료사 과정 수업을 듣는 중, 강렬하게 와닿은 단어가 있었다. 언어감각이 좋으신 스승님이 (아마도) 만든 용어인 '상처중독'이 그것이었다. 중독은 어떠한 것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담배를 끊을 수 없다, 술을 계속 마셔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등.
상처중독은 '나는 이러이러한 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라는 것이 나를 설명하는 가장 큰 줄기인 상태이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상처가 있고, 그로 인해 생긴 자신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다. 그래서 다소 불편할 때도 있다. 대개의 상처경험과 그로부터 파생된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은, 그때그때 튀어 나오고 그때그때 가라앉아가며 우리네 삶의 일부에 오돌토돌한 자욱들을 남긴다. 그건 그냥,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상처 경험'이 내 인생과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전체가 되고, 그 거대한 이야기 구조 속에 빠져서 그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고서는 자신을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면, 그것은 상처를 넘어선 상처중독 상태다. 상처경험은 분명 지나간 어떤 과거의 일이고,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내 일상의 모든 현재 경험들에 과거의 [기억]을 갖다 붙여서 해석하고, 현재에도 마치 그 상처를 또 겪고 있는 것처럼 반복재생한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인지도 모른다.
상처의 기억을 재생하고, '나는 이런 상처를 가진 사람이고, 지금도 그 상처로 인해 이러이러하게 살고 있다'라고 여기는 상태.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런 성향이 조금씩은 있지 않을까 한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리고 보다 단순화시켜 이야기 하자면, 나의 모친은 활발한 커리어우먼인 여성이었어서, 어린 시절 늘 바쁘고 나를 잘 돌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바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고, 강한 자극(상을 받아왔다거나, 그림을 잘 그렸다거나 등)을 엄마에게 제공하면 칭찬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뭐든 잘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보다 독립적이고, 공부도 일도 잘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내가 상대에게 '관심을 받을 무언가'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있는 그대로 허물없이 다가가고 있는 그대로의 애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는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그 누구에게나, '나의 이러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저러한 성향이 생겼고, 그래서 요러한 부분이 어렵다'라는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잘 기능하면서 살고 있지만, 가끔 어떤 부분이 건드려지면, 저 스토리 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아, 역시 이런건가-'하며 상처 속 나를 재생할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난 상처중독 상태이다.
어떤 여성이 어린 시절 오빠나 남동생에게 더 잘해주는 부모님으로 인해,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열등감이나 무력감에 가까운 부정적 감정을 더 키웠던 상처를 갖고 있다고 하자. 어린 그녀는 어떻게 해도 남자형제를 이길 수 없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받을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남자'인 형제와 사이 좋게 지내고 늘 양보하면 부모님은 '착하네'라고 했다. 남자에게는 고분고분해야 하고, 남자들이 좋아하고 요구하는 무언가에 자신을 맞춘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 자기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아빠, 오빠, 남자친구, 남편에게 자신을 맞추며 종속적으로 살았다. 그러면서 마음 속에는 당연히 '이게 아닌데'하는 불안감과 분노가 또아리를 틀 수 밖에 없고, 자기가 뭔가 잘못한게 아님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스스로 지레 포기하는 것들이 생기고, 그건 다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그녀의 상처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아들을 더 이뻐라했다고 해서, 그녀가 현재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후순위로 둘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세상이 '남자를 여자보다, 다른 이들을 그녀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지레 그렇게 자신을 뒤로 미룰 뿐이다. 과거의 상처 경험을 현재로 가져와서, 어쩌다 생겨나는 경험들(사실은 실제로 일을 더 잘하고 경력이 많은 남자 직원에게 중요한 일이 가고, 아직 경험이 적은 자신은 보다 비중이 적은 일을 맡게 되는 합당한 상황)을 '여자라서 그래'라며 상처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이 그녀의 삶을 거대한 [상처 재생 플레이어]로 만든다는 것을 모른 채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상처 재생을 멈추고 현재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상처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 역시 크고 작은 상처중독이 있을 한 사람으로서, 그 방법을 알고 싶단 생각이 든다. 머리와 지식으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언제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이라, '마치 이렇게 하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상처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다루는 것이 [상실]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이것을 충분히 슬퍼하며 [애도]하는 일들이라 한다. 심리상담 및 심리치료는 이 과정을 도울 것이고, 마음 공부는 '마음을 바라보며 다루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고의 장난임을 깨달으라 할 것이다. 무엇이 되건 내 마음이, 가슴이 정말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느껴야, 상처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지금, 나에게도 상처가 있고, 그 상처로 인해 현재 내 삶에 힘들고 불편한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상처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인지, 그래서 그걸 현재에서도 플레이시키고 있는게 아닌지 곰곰히 따져볼 일이다.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나에게 들어오는 자극이 다 내 상처를 건드리는걸로 느껴진다면, '정말 내가 생각하는게 맞는가?'부터 반문하는걸로 시작해야할 것 같다. 사실은, 정말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상처경험 기억의 리플레이임을 알았다면,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할 것이다. 이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 이거다 싶은 말은 하지 못하겠고, 나 역시 찾아가는 중이지만 이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그때 그런 경험을 했고, 상처를 받았어. 괴롭고 슬펐지.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나에게 상처를 줬던 그 일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아. 일단 어쩌라고-?라며 밀어내보는 것. 그 다음은,
'내가 원치 않는데, 어쩌라고?'
특정 패턴대로 쓸려가는 느낌이 든다면, 그리고 그것이 싫고, 내가 원치 않는 일이라면. 그런데 쓸려가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뚜렷한 이유도 없이- 느낀다면, '내가 원치 않는데 어쩌라고?'라고 던져보는게다. 그 누구도 내 속에 들어와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줄 수는 없다. 내 몸뚱이에 들어차 있는 <나>라고 자각하는 무언가를 책임질 존재는, 그리고 책임지는 선택을 하면서 삶을 꾸려갈 존재는 오로지 나뿐이다.
상처 받은 것은, 털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하는 많은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있고, 그 중 하나가 내가 되지 말란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