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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Sep 19. 2016

투사를 거둬야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나는 무엇을 싫어하는가?


 

작년에 마친 미술치료사 과정 중 워크샵 수업에서 했던 과제가 있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거나 동경 혹은 닮고 싶은 사람을 이미지화하는 것 / 반대로 혐오하거나 거슬리는 사람을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투사하여 사람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인 수업이었다.

 


투사를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의 말로 쉽게 풀이하면, '남탓'이다. 입만 열면 남탓을 하는, 곁에 있으면 피곤한 사람에서부터, 은연 중에 환경과 남탓을 하며 일상의 푸념 정도로 넘길만한 하소연을 하는 사람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이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결국 '투사'다. 방어기제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투사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패와도 같다. 그런데 그 방패의 안쪽에는 거울이 달려 있어, 방패로 상대(적)을 가리면 방패 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결국 상대를 통해 나의 싫은 점을 보는 것이다.


 

과제를 생각하면서, 처음엔 반농담으로 달라이라마 / 모 정치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누구나 존경하고, 누구나 싫어하는(성자/부패한 정치인) 사람 이름을 들고 오라는 것은 아닐터.

 

내가 평소에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꺼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봤다.

 


마음이 평화롭고, 약자를 돌보고, 보다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며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흠..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권위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나는 싫어한다. 독선적인 사람도 불편하다. 누가 좋아하겠느냐마는.


 


이런 것들 중에, 내가 투사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A는 A고 B는 B야-하고 다소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라벨을 붙여 버리는 잔인한 단호함이, 내가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나에게 존재하는 부분인 것 같다. 20대의 나는 극단적으로 A/B를 나누는 편이었다. 다양성이나 사람의 깊은 속사정을 헤아리질 못했다. 지금은 그런 부분이 많이 좋아져서, 관대하다고는 못할지라도, 상대의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렇군'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전 직장에서, 투사와 자기연민, 권위주의 기타 등등을 모두 갖춘 상사와 부딪혀 힘들어 하면서, 더 깨닫게 된 점이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판단은 혼자 해도 그만이지만, 그것에 '힘'이 실려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독이 된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상대가 나에게 '너는 이러이러해!'라고 낙인 찍고 멋대로 평가할 때 느꼈던 분노와 억울함이, 그대로 나의 산 스승이 되었다. 나는 그 사람의 그런 점을 참으로 싫어했는데, 그 역시 자신의 사정이 있었다. 인정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하지만 아니라고 우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지를 돌아보았다. 동종혐오라고, 나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어서 그 사람이 유난히 거슬렸던게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이 같은 점을 느꼈기에, 나만의 유난스러운 문제는 아니었고, 내 성격상 그런 이에게 굽히질 못하기 때문에 더 요란하게 부딪힌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내린 결론은, '나에게도 그런 점이 있다!'였다. 나 역시 대상이 특정 인물이 아닐 뿐이지,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있고, 맘 속에서 쉽게 분류하고 판단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이다.



 

가끔 잡스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분류와 싸잡은 판단'이 내게서도 나온다. '남자는 원래 그래'라며 조롱하는 투로, 쉽게 남자를 저급한 무리로 치부한 적도 있다. 포르노를 찾아보며 낄낄대는 남자들을 보면 순간 혐오감이 밀려 올라와서, 아 남자가 다 그렇지 뭐-하고 싸잡아 비난하는게다. 단지 그 놈이 그런 것일 뿐인데!! (미안합니다, 모게시판에 이상한 글을 쓰신 어느 집인가의 아드님.)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싸잡아 비난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한 면만을 보고 낙인 찍어 죄인 취급하는 이런 부분이 가끔 튀어나오는데, 내가 만났던 그 상사에게서 이 부분을 발견하고 유난히 더 내 눈에 띄고, 더 느껴지고, 싫어했던게 아닐까?



 


인정받기에 관한 것도 그렇다.



누구나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어린시절을 치열하게 살아낸다. 이것이 왜곡되어 성인기까지 가면, 타인에게 인정 받기 위해 애쓰는 가련한 사람이 된다. 나 역시 인정받기 위해 뭔가를 잘 해낸 어린이였고, 20대까지는 회사일도 그 연장선상에서 열심히 했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타인에게 인정 받기 위한 삶이 얼마나 노예같은 삶인지를 깨닫고 이제는 꽤 자유로워진 편이지만, 아직 마음 속에 이런 것이 남아 있어서인지, 인정 받기 위해 애쓰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지금의 나 자신도, 인정 받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일부러 하지는 않더라도, 인정을 받으면 기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의기소침해진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누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니 좀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가다듬을 일이다.



투사는 남을 향한 감정의 화살표이다. 이것을 거두어 나 자신에게 돌리면, 비로소 내가 보인다. 이러한 것에 웃는 내가, 저러한 것에 우는 내가 보인다. 그 모습이 썩 점잖은 것도 아니고, 유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나이다. 지금 누군가의 어떤 점이 싫다면, 그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다면, 그 손가락을 나에게로 돌려 그 싫은 점이 나에게도 있는게 아닌지, 혹은 그것을 싫어해야 내가 더 돋보이는 부분이 있는지 (그래서 내가 더 안전하다 느끼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진짜 나를 용기 있게 마주해야, 타인 역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맘의 여유가 생길 터이다. 나 자신도 못 받아들이면서, 타인을 받아들일 여유가, 깜냥이 될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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