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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Sep 10. 2016

우월감과 열등감은 쌍둥이

자존감을 키워라,같은 말이 유행하는 슬로건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자존감을 키우라는 이야기에 같이 딸려오면서 흔히 듣게 되는 단어에 '열등감'이 있다.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것에서 오는 절망감이 열등감이고, 이것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면 내가 실제로 서툰 분야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주춤하며 실력발휘는 커녕 시도조차 망설여지게 되기도 한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롭고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지는, 이제는 흔해진 심리서적 등을 통해서, 매체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많이 접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갖고 있는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열등감을 가진 이들과 달리 긍정적인 정서로 삶을 살아나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못함'과 '잘함'의 차이가 개인의 정서를 좌우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우린 잘 알고 있다. 분명히 그 누구보다도 '우월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이 불행해하는 것을 참 많이도 보았다. 어휴, 저런 배 부른 소리 하는 작자들 같으니,라며 혀를 끌끌 차고 넘겨버리기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우월감은,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에서 오는 또 다른 절망'이다. 내가 남보다 잘났기에 느끼는 기쁨은 잠시 뿐, 계속 그것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불안이 따르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더 큰 절망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방향을 보고 있는 한 몸을 가진 정서이다.

왜 '잘하고 못하고'가 개인에게 그렇게 중요할까? 내가 내 친구보다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스킬상의 단계가 있는 것이라면, 이를테면, 나는 그림 초심자라 스케치도 서투르고, 친구는 미술을 전공해서 그림이 능숙하다면, 여기에서 나는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비교해가며 열등감을 느낀다. 어째서 너는 이런 것을 그렸고, 나는 저런 것을 그렸다!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너보다 못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수치화될 수 없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그림 자체가 담고 있는 속성때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평가나 반응이, 내 그림보다 친구의 그림에 더 많이, 긍정적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친구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정말 그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가? 그들의 판단이나 반응이 절대적인가? 그럴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느끼는 '열등감'은 내 그림의 절대적 가치와는 멀어져 있다. 그림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관심>, <애정>의 정도가 나에게 '내 그림이 친구 그림보다 못하고, 나는 저 친구보다 못났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측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수'는 어떤가? 90점을 받은 친구와 80점을 받은 나는, 확실히 점수로 측량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10점 낮은 내가 10점만큼 그 친구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10점의 차이로 인해 친구와 내가 받게 되는 여러가지 보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매우 크고 의미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와 나는 진학할 수 있는 학교나 취업할 수 있는 직장이 다를 것이고, 급여가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 받는 대우와 관심'에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 10점만큼을 더 받은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타인의 피드백'이 달라질 것임을 알기에 열등감을 느낀다.
결혼시장에 나갈 때 스펙이 좋으면 더 각광받는다. 더 많은 이성이 '나를 사랑해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특정인과 개별적인 관계에서 충실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과는 무관하다. 단지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열등감의 기저에는 '타인의 애정과 관심'이 깔려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남보다 관심과 애정을 덜 받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절망스러운 상태'가 열등감의 다른 풀이이고, '내가 남보다 관심과 애정을 더 받을만한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하는 불안한 상태'가 우월감의 다른 풀이일지도 모른다. 결국 양쪽 모두, 관심과 애정을 필요로 하기에 생기는 마음이고, 같은 유전자를 타고 났지만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쌍둥이이다. 애정결핍의 쌍둥이.
 
우월감에 빠진 사람은, 겉으로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보다 더 나아 보인다. 일단 뭔가 더 잘났으면 잘났지, 못난 것은 아니고,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뭐라도 더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갖고 있기에' 더 불안하다. 내가 우월한 점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이 날 봐주고 관심을 갖고 애정을 준다는 것을 늘 확인하며 살고 있기에,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한 자신을 드러냈을 때 그 관심이 거두어질 것임을 알고 있다. 관심과 애정이 없어지는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과 직결되기에 더욱 두렵다. 그리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내리 누름으로써,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한다고 생각한다. 학벌, 재력, 지위, 외모, 지성 그 무엇이 되었건, 자신이 좀 더 우월한 분야의 가치를 피력하며 부족한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깔보거나 무시한다면, 그가 가진 우월한 점은 '멋있는 개성'이라기 보단, '사랑받기 위해 처절하게 사용하는 삶의 무기'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남보다 어떤 것을 좀 못해도 괜찮다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네가 사랑스럽다는 말이 필요한게 아닐까.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남보다 어떤 것을 잘하는 것은 멋지지만, 그것을 잘하건 잘하지 않건 있는 그대로의 네가 사랑스럽고, 무언가를 못하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말이 필요한게 아닐까.
 
뭐든, 있는 그대로 멋있으면 멋있다고 인정하면 그만이다. 어떤 것을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잘할 수도 없거니와 잘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잘하던지, 혹은 못하던지, 그것은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애정과 등가교환되는 그 무언가가 아니다. 애정이라는 보상을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숙제같은게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체로 멋지고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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