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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Aug 24. 2017

좋은 엄마

모성에 대한 환상

에리히 프롬은 저서에서 좋은 엄마란 행복한 삶을 사는 엄마라고 했다.

모성애는 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조건없는 긍정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점을 더 짚어봐야 하는데, 그것은 아이의 생명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아이의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을 지속시키는 데 꼭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다. 나머지 하나는 단순한 생명 유지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아이의 마음 안에 삶에 대한 사랑을 스며들게 하는 일이다.

... 이런 사상은 성서에서도 다양한 상징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묘사된다. 젖은 생명에 대한 긍정과 보호라는 모성애의 첫 번째 측면을 상징한다. 꿀은 생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는 기쁨을 포함하는 삶의 달콤함을 뜻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젖"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꿀"을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일 뿐이다.
아이에게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먼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 어머니가 아이에게 주는 영향은 강력하다. 삶에 대한 어머니의 불안감은 그가 가진 사랑만큼이나 쉽게 아이에게 전염된다. 어머니가 보이는 삶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불안, 이 두 태도는 아이의 전 인격에 깊은 영향을 준다. 우리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른들 사이에서도, "젖"만을 받은 사람과 "젖과 꿀"을 함께 받은 사람을 충분히 구분해낼 수 있다."


우리는 모성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엄마'는 모두 진한 모성애를 갖고서 아이를 대하고, 모든 엄마는 존경스럽고, 그립고, 숭고한 존재라는 환상 말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은 여성은 그 숭고한 기준과 자기 실체와의 괴리감으로 괴로워하고, 알게 모르게 모성애의 화신이 되길 요구 받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숭고한 모성은 원형적인 환상이고, 보편적이지 않다.

이유는 위의 에리히 프롬의 인용에 나와 있다. 우리가 품고 있는 '환상적인 모성애'를 줄 수 있는 여성은 젖과 꿀을 동시에 주는게 가능한 진실로 행복한 한 개인이지 '엄마 전체'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엄마가 다 좋은 엄마라거나, 모든 엄마는 다 대단하고 숭고하다는 믿음은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엄마를 주눅들게 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임의의 개인이 '엄마'일 확률이 높을까 '자식'일 확률이 높을까?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자식이지만, 엄마인 사람은 여성 중에서도 출산하여 아이를 기르는 여성에 한정된다. 그리고 그런 여성 역시 날 때부터 엄마였던게 아니라 일생일대의 대사건(임신과 출산)을 통해 엄마가 된 것일 뿐이다. 그녀도 자식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자기 엄마에게서 사랑받길 갈구하며 살던 기간이 더 길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엄마'를 제대로 체험한 사람보단 '자식'에 감정이입하는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고, 자식 입장에선 사랑이 가득한 엄마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품는 쪽이 더 쉬울런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암묵적, 공식적 지침들은 어쩌면 자식인 이들이 '우리 엄마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한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도 자기 자신이 정서적 지지라곤 없는 엄격한 귀족 가문에서 자란 결핍으로 애착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지 않는가.


모성애를 보는 환상을 거두어낸다 하더라도, 역시나 '좋은 엄마'하면 떠오르는 보편적인 느낌은 남는다. 사랑이 넘치는, 자애로운, 공감적인 엄마. 이게 비단 엄마만을 위한 수식어일까? 에리히 프롬이 말한, 젖(육체적 양육)과 꿀(삶에 사랑이 스미게 하는 것)을 주는 '좋은 엄마'는 결국 그냥 '좋은 사람'인건 아닐까. 행복한 사람, 본인이 행복하고 내적으로 충만하여 삶을 사랑으로 가꿔가는 사람, 그 누가 봐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푸근해지는, 곁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그런 소수의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지, 엄마가 되면 절로 그리되는 것은 아닐게다. 물론 아이를 통해 봉인이 풀리듯 개인의 마음이 넉넉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좋은 엄마가 되고, 개인의 인격이 엄마의 인격이 되는거다. 인격수양은 엄마 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삶의 과제이고, 개인마다 그 수준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엄마란 존재가 '마치 좋은 사람이자 인격자가 되어 아이를 대하는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엄마는 죄책감으로 되려 본인 생긴대로 키우는 것만 못한 부작용을 겪고, 당사자도 아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말만 많은 주변인들이 엄마에게 과도한 요구를 해서 또 피곤하게 만든다. 그냥 인정할 것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본인 생긴대로 아이가 보이고, 본인 생긴대로 아이를 키우게 되는 것이며, 자기 인격수양이 되는만큼 아이도 잘 키울 수 있다고. 그래서 엄마건 아빠건 부모 공부는 인격 공부이자 평생 공부라고. 엄마라고 다 잘해야하는게 아니라 삶의 과정 중 하나고, 육아를 통해 더 자극 받아 인격 공부하라고 주어지는 일종의 인생 미션이다. 그러니 이는 엄마만의 것이 아니다. 아빠, 할머니, 이모, 삼촌, 교사 등 아이를 대하는 모든 어른들이 같이 좇아야할 자기 목표(=나는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겠다)로서 '좋은 어른되기'가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성애, 좋은 엄마는 환상이다. 사랑을 줄 줄 아는 행복한 사람, 인격수양이 된 상태가 모든 개인의 목표로 존재하는 것이고, 모성애나 좋은 엄마는 그런 사람이 엄마가 되었을 때 자연스레 스며 나오는 한 갈래의 아우라이자 역할일 뿐이다. 그렇게 보면 절대적 기준은 의미가 없어진다.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 꾸준히 배우고 느끼고 노력하는 자세만 있다면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다. 아이와의 애착을 쌓기 위해 중요한 것은 30%의 좋은 반응행동과, 70%의 진정 작업(아이가 불안정할 때 이를 진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고쳐나가는 과정 자체로 충분하다. 절대적 가이드라인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육아지침은 버리고, 내가 아직 갈길이 먼 개인이란 생각을 바탕으로 겸허하게 자기성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자세부터 갖는 것이 육아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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