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일지 009

시간을 내는 사람

by 김어항 AHANC


연장 근무로 지친 하루를 장식하고
쓰러졌다

아니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퍼졌다
누운 느낌이 아니라 흘러내린 느낌이다
살기 위해 눈을 감은 밤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가족이겠지 싶어 습관처럼 화면을 들여다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친구의 이름.
오랜만의 전화였다.
힘든 척도, 반가운 척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았다.

“오, 웬일이야? 요즘 잘 지내?”
“...요즘 너무 힘들어.”

폰 너머로 들리는
나지막한 친구의 목소리.
그 말 한 줄에
내 몸이 잠시 멈췄다.

순간의 머뭇거림,
나도 나를 조금 늦게 깨달았다.

오늘 나는 누군가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야, 미안해
오늘 내 하루가 너무 빠듯했다는 이유로
너의 무너진 마음 앞에서
나는 한 발 물러섰다.

나 자신에게도 위로 한마디 못 건네는 밤,
나는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을
목 끝에서 삼켰다.

널 아끼지만
오늘은 내가 나를 더 가누지 못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너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집 나간 정신을 붙잡고
너의 말들을 음미하며
마지막에 조용히 말했다.

“힘들겠구나. 고생이 많네.”

너는 몰랐겠지만,
그 말에 마음을 다 실었다.

사실은 더 듣고 싶었고
더 오래 말 섞고
더 큰 위로를 건네고 싶었어.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너의 그 말,
“힘들다”는 그 짧은 문장이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건지
나는 알아.

그 말을 내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천천히 말해 봐. 나 시간 많아.”

그 말을 해 주지 못한 내가
조금 밉다.

“말할 틈”이 아니라
“말할 공간”을 내어주었어야 했는데.

넌 어쩌면
무너진 마음이
안전하게 부서질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했을 텐데.

내 서두른 위로가
오히려 널 더 삭히게 한 건 아닐까.

맞장구보다
묵묵한 기다림이
더 따뜻했을 텐데.

나는 내 인생에 쫓겨
너를 서둘렀다.

며칠이 지나
정신이 돌아오니
너가 제일 생각나고 신경이 쓰이더라



“천천히 말해 봐. 나 시간 많아.”

그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무너진 하늘의 유일한 숨구멍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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