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일지 031

2025 1228

by 김어항 AHANC

어떤 인연은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무게를 드러낸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
경성대역 근처 작은 가게

일식 도시락집


지금 돌이켜 보면 일했다기보다는
그저 버텼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고시원에 살던 시절이었다
돈도 없었고 마음도 늘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때 사장이던 영민이형이 말했다
“돈 많이 드니까 그냥 가게에서 먹고 자고 해”
그 말이 얼마나 큰 말인지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그냥 숨이 조금 덜 막혔을 뿐이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 칼을 잡았지만
그보다 먼저 배운 건 태도였다

자기 몫을 해내는 법
힘들어도 티 내지 않고 버티는 법
그 시절이 나에게 쉬웠을 리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쓰라림과 더불어

묘한, 따스한 아지랑이가 핀다

내 어렸을 시절의 장면들은
시간을 건너

어딘가 그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듯하다.

그 뒤로 몇 년이 더 지나

부산에 다시 내려갔을 때
형은 밥을 사주며 응원을 건넸다

대단한 말은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누군가 나를 믿어줬다’는 감각으로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형 결혼식 날, 인천에서 부산으로 내려가
축가를 불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단 사실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 후로 나는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다
살다 보면 그렇다
각자의 삶을 감당하는 데에
말 한마디 꺼낼 여유조차
없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고마움이 옅어진 적은 없다


해운대에서 한여름에 파라솔 아래 앉아있던 그 시절 우리 직원 식구들,


광안리에서 돗자리 깔고 고기 구워 먹던 날들,

잘 하지도 못하던 술 한잔을 받으며

들었던 말들,


그 모든 장면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어 귀한 재료로 쓰였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다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흐른 뒤에 꺼내는 인사는

내가 봐도 참 늦은 것 같아서

더 마음에 주름이 져있었나 싶다

이 답장을 보내왔다

“힘들어도 티 안 내고 견디는 사람이 제일 독한 거다.
너는 그걸 해냈고, 지금까지도 잘 해오고 있다.”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오래전의 나를
그대로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어떤 인연은
자주 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없이 지나갔는데도
시간이 흐른 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나는 아직 치열하고 부족하다
앨범을 준비하며
여전히 하루하루를 만들고 있지만

멀지 않은 날에 부산에 내려가
형과 편안하게 식사하며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그때까지,
이 인연은 내 안에서
조용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버텨온 시간들 속에는


분명


그 시절 나를 스쳐지나간 모든 순간과 사람들에게서

배운 태도가


여전히 지금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