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회색빛 도시에서 건져 올린 아랍의 향기
지난 3월 1일 (미국시간 기준)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습으로 긴장감이 고조된 이 즈음, ‘팔레스타인_ 삶과 일‘의 연재를 잠시 멈추는 것이 어떨지 고민하다가, 어찌해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상이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 글의 연재를 잇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 수행자로 한동안 팔레스타인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오랜 세월이 지나 '웰다잉을 위한 웰빙의 삶'을 전하는 몫으로 삶의 방향을 다잡아 가면서 다시 정리하는 글입니다.
팔레스타인 첫 출장의 일주일을 넘어설 즈음, 이방인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풍경은 온통 척박한 회색빛으로 물든 대지이다. 매 순간 과업의 범위를 새롭게 정리하고 현장의 실행 가능성을 치열하게 점검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시선은 점차 단순한 업무의 경계를 넘어선다. 단지 원조를 수행하기 위한 좁은 틀에 매몰되기보다 이 땅의 사정과 사람들의 굳건한 일상에 자연스럽게 이끌리다 보면, 어느새 국경과 장벽이라는 물리적 한계 너머에 자리한 신비롭고도 웅장한 문화적 뿌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 시선을 이 고립된 지역에서 한 걸음 물러나, 팔레스타인이라는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거대한 모태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3억 2천만 명의 숨결, 아랍 세계를 향한 거시적 확장 아랍권(Arab World)에 대한 관심은 이번 팔레스타인 방문을 기점으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거시적인 통찰로 확장된다. 흔히 아랍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24개국을 일컫는 아랍 세계는, 아프리카 북서쪽 해안에서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전체 인구가 약 3억 2천5백만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문화권은 무슬림 세계의 전체 인구 중 약 5분의 2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인 규모와 응집력을 자랑한다. 알제리, 이집트, 수단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부터 요르단, 이라크를 거쳐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임시 수도 라말라(Ramallah)까지 아우르는 이들은, 역사의 한 축을 당당히 지탱해 온 거대한 세계관을 끈끈하게 공유하고 있다.
(지금 세계가 앓고 있는 많은 분쟁과 다툼의 근원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문화적 교감이 빚어낸 묵직한 통찰 이 낯설고도 웅장한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문가로서 현지인들과 피상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첫 단추가 된다. 며칠 전 비르젯의 낡은 골목길 식당에서 겪었던 시간의 묵직한 더깨와, 이방인에게 대가 없이 내어주던 따뜻한 환대는 단순히 한 개인의 선의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년의 거친 역사를 견뎌오며 이 거대한 아랍 공동체가 몸소 체득하고 전승해 온 다정한 정서적 자산이자 깊은 유대감의 발로였음을 깨닫는다.
흙먼지 날리는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묘하게 차분한 공기에는, 어떠한 외부의 억압 속에서도 잃지 않는 그들만의 굳건한 삶의 방식과 강인한 문화적 자부심이 짙게 배어 있다. 척박한 땅 위에서도 평화를 갈구하며 묵묵히 존재를 이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음은, 결국 아랍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인 거대한 에너지의 일부분인 것이다.
시혜를 넘어선 존중, 진정한 연대의 시작 이러한 깨달음은 입국 순간부터 시작해 호텔과 음식,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일정 속에서 일일이 기록했던 여정의 조각들을 완전히 새로운 실행의 동력으로 탈바꿈시킨다. 지금껏 중동의 복잡한 분쟁 역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진실, 즉 척박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이면의 보이지 않는 진짜 힘은 외부의 원조가 아니라 그들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아랍의 향기임을 확인한다.
이 거대한 문화권의 한복판에서,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세계 지도 위에 찍힌 작고 고립된 분쟁 지역이 아니다. 3억 인구가 공유하는 찬란한 역사와 언어, 그리고 맹렬한 신념의 한 축을 당당히 담당하며 맥동하는 역동적인 현장이다. 단순히 우리가 돕고 물질적인 시혜를 베푸는 일방적인 대상을 넘어, 그들이 오랜 세월 축적해 온 문화적 깊이와 존엄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협력과 상생의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한다.
이제 늦은 밤, 다음 일정을 위해 수첩을 펴고 라말라에서 마주한 웅장한 아랍의 숨결을 꼼꼼히 갈무리한다. 비록 전운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속에서 건져 올린 통찰이지만, 여기서 발견한 문화적 자부심과 연대의 가치는 서울로 돌아가서도 삶과 과업을 대하는 정직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지도 위의 고립된 분쟁 지역이 아니라 3억 아랍 세계의 웅장한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깨달으며, 그들의 깊은 문화적 뿌리를 향해 존중의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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