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_삶과 일(II)

12. 낯선 경계 위에서 마주한 본능적 감각

by 기린

이 글은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 수행자로 한동안 팔레스타인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오랜 세월이 지나 '웰다잉을 위한 웰빙의 삶'을 전하는 몫으로 삶의 방향을 다잡아 가면서 다시 정리하는 글입니다.


이방인에게 국경과 새로운 경계를 넘는 일은 흔히 설렘과 호기심의 대상이지만, 분쟁의 불씨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땅에서의 경계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날 선 장벽이 된다. 예루살렘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성지 이면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접경을 수시로 넘나들며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이들의 엄중하고 서늘한 현실이 놓여 있다.

사뭇 다른 팔레스타인의 색, 하늘은 같은데 …..

생존의 감각을 일깨우는 물리적 고립 보안을 명목으로 치러야 하는 철저하고도 반복적인 검문 절차는 이 나라가 처한 전운 섞인 일상을 뼈아프게 깨닫게 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을 통한 직접적인 출입국이 원활하지 않아 버스와 비행기를 수차례 갈아타고 카타르나 요르단으로 멀리 우회해야만 하는 척박한 현실은, 이 땅이 가진 물리적·정치적 고립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만든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철저히 통제된 듯한 이 거대한 단절감은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이방인의 어깨를 시작부터 무겁게 짓누른다.

밝은 톤(tone)을 찾기 어랴운 이곳은 여전히 그곳


낙타와 메르스, 낭만이 아닌 실존적 위협 극도의 긴장 상태는 일상적인 풍경조차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만든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낙타 무리는 평화롭고 이국적인 중동 풍경의 낭만적인 상징이 아니라, 당시 맹위를 떨치던 메르스(MERS)라는 실존적 위협이자 공포의 얼굴로 다가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처럼, 분쟁 지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마주한 미지의 존재는 이방인의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지날 때마다 낙타가 내는 냄새에도 역사를 느껴진다

이국적인 정취를 즐기며 사진기 셔터를 누를 여유도 없이 쫓기듯 급히 자리를 피해야만 했던 그 순간의 씁쓸한 당혹감은, 이곳이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는 낭만적인 여행지가 아님을 몸소 증명하는 생생한 기록이 된다. 낯선 여행지에서 수시로 느껴야 했던 서늘한 긴장과 본능적인 경계심은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놓으며, 보이지 않는 위험에 맞서기 위한 방어 기제를 쉴 새 없이 작동시킨다.

누구를, 무엇을 가다릴까?

이러한 내면의 긴장은 물리적 장벽 앞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버티고 선 삼엄한 검문소의 공기, 그리고 실탄을 장전한 채 오가는 무장 군인들의 차가운 시선은 발걸음을 떼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든다. 철저하게 통제되는 국경 시스템과 삼엄한 분위기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였다는 짙은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그 사투에 가까운 단절과 억압의 환경 속에서도 틈틈이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단상들은, 이 척박한 땅에서 내가 건져 올릴 소중한 조각들이자 스스로를 지탱하는 유일한 끈이 된다.


돌무더기 틈에서 피어난 생명의 증명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두려움과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시야는 이 땅의 아주 미세한 변화조차 기민하게 포착해 낸다. 무너진 돌무더기와 잿빛 콘크리트 잔해 사이, 그 비좁고 메마른 틈을 기어이 뚫고 고개를 내민 작은 들꽃 한 송이를 발견하는 순간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투박한 담벼락을 무성하게 뒤덮으며 뻗어 나가는 강인한 넝쿨 식물들을 바라보며, 잔뜩 웅크리고 있던 이방인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칠고 날 선 억압의 공간 속에서도 생명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식물들이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자연의 모습은,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인한 궤적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곳 곳에 흐드러진 꽃이 반긴다


비르젯으로 향하는 길, 시선의 변화 예루살렘의 소란스럽고 날카로운 경계의 공기를 뒤로한 채, 차를 달려 팔레스타인의 깊숙한 안쪽인 비르젯(Birzeit)으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여전히 온통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회색빛이지만, 메마른 대지 위를 흐르는 공기만큼은 이전보다 묘하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일주일을 넘어선 긴 출장 일정은 육체적인 피로를 몰고 오지만, 이 척박한 땅에 깃든 사람들의 삶을 직접 마주한다는 사실은 결코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메마른 돌무더기 틈새에서 꽃을 피워낸 식물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이 낯선 땅이 주는 압박감에 무력하게 순응하기보다 내가 수행해야 할 일의 범위를 다시금 정교하게 다듬어 본다. 내일은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낡은 주방에서 음식을 짓는 할머니의 따뜻한 식탁이든, 혹은 불가능 속에서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의 맑은 눈빛이든 간에 나는 기꺼이 그 마음의 경계를 넘어설 준비가 되었다.

날 선 국경에서 잔뜩 곤두섰던 이방인의 경계심은, 어느덧 비르젯을 향하는 메마른 대지의 차분함 속에서 현지인들을 향한 조용한 연민과 기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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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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