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여름방학,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엘리트 프로그램이라는 취업 프로그램을 런칭했다. 취업을 위한 이력서 작성법, 면접 실습, 동기부여 강의, 선배들과 기업에서의 강의등 알차게 운영되었던 프로그램이었다.
그곳에서 실습 삼아 작성해본 이력서를 실제로 취업하는 것처럼 여러군데 지원을 해 보았다. 대기업에 갈만큼의 스펙은 하나도 없었다.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문 분야는 그냥 학문일 뿐, 실제로 취업할때는 지원할만한 곳이 없었다. 어쨌든 취업 실습이지만 이력서를 여러군데 제출해보았고, 연락 온 곳 중 해외영업 사원을 모집하는 곳이 있었다.
위치는 안성에 있는 공도, 자동차 사출 금형을 만드는 제조회사였다. 수원 버스터미널에서 안성까지 버스를 타고 공도 터미널에서 내려 차를 타고 5분정도 더 들어가야하는 곳이었다. 면접을 가면서 이곳은 합격을 해도 안가겠다고 다짐했었다. 너무 멀었고 공장 뒤에는 돼지 축사가 있어서 그 당시에도 냄새가 엄청 났었다.
회사는 사람이 급했는지, 나에게 바로 합격 통보를 했고 나는 고민했다. 어차피 졸업하기 한 학기 전이고, 다니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고 다른 회사를 가도 된다는 주변 여러사람의 조언에 입사를 했다.
그 당시 영업부는 4명이 있었는데, 국내영업 3명, 해외영업 1명이었다. 해외 사업이 많이 벌어지자 한명이 급하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들어간 해외영업 부서 (2명이지만)에는 나의 사수가 있었다. 나보다 4살 많은 알밤처럼 생긴 사수.
사수에게 처음으로 비지니스 영어 이메일 쓰는 법을 배웠고, 금형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금형은 나에게 정말 어려운 제품이었다. 문과의 머리로 이과의 것들을 이해해야만했고, 이걸 영어로 번역까지해야한다!
거기다가 이 회사는 직원이 약 120명 가량이었고, 사무실 여직원은 5명정도 되었다. 두명은 프론트에서 재무나 총무를 담당했고, 한명은 영양사, 한명은 기억이 안난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여직원들만 돌아가면서 사무실 청소(재떨이 비우기도 함), 화장실 청소등을 담당했었다. 그리고 내가 영업부로 들어오자, 영업부에 손님이 오면 나더러 커피 심부름을 하라고 총무언니가 계속해서 항의하는 바람에 신경전이 있었다.
아무튼, 사수는 미국 자동차 회사의 제품을 맡았고, 미국 이외의 나머지 기타등등 나라는 내가 맡게 되었다. 기타 등등 나라는 정말 기타 등등이었다. 맡게 된 이란, 인도, 유럽 비지니스. 그 당시는 기타 등등 나라에서 발주 받은게 없었기 때문에 금형도면을 받아 견적서를 설계나 영업부 이사님, 부장님께 요청하고, 견적받은것을 계산해서 다시 오퍼하는 그런 업무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해외에서 손님이 오시면 영어로 프리젠테이션 하는것! 첫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했을 때가 생각난다. 사수가 없어서 내가 하게 되었는데, A4용지에 영어로 회사 소개를 두 장 정도 쓴다음에 화장실에서 달달 외웠다. (미국 비자 영어 인터뷰할때 준비했던 대로 무조건 외우다보면, 당황하지 않고 나의 언어로 표현이 된다) 결과는?? 프리젠테이션은 하긴했는데, 질문을 못알아듣네? ㅋㅋㅋ
그렇게 나는 대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첫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첫 출장으로 가게 된, 이란
이란은 우리나라의 중고차량을 상당히 많이 수입을 하고 있었는데, 중고차량을 구입하였기때문에 자동차 부품이 상대적으로 많이 필요한 나라였다. 우리 회사는 이란에 에이전트가 있었는데, 플라스틱 부품 전시회를 한다며 전시회에 초대를 했고, 기타 등등 나라의 담당인 나와 부사장님이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일정이 촉박하여서 여행사에 연락하여 비자를 얼른 신청을 하였고, 비행기표를 끊고 기다리는데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 비자가 리젝당했다는 것이다 (부사장님 비자는 통과)
머라고? 이란 비자가 리젝이라고? 아니! 미국비자도 아니고 이란 비자가 왜!
알고봤더니 이란은 중동에서 부유국에 속했고, 많은 중동사람들이 이란에 가서 불법 체류를 하기 때문이란다. 거기다가 여성들은 비자를 더 받기 힘들다고...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이란의 대기업에서 Invitation letter를 받는 것. 다행히 이란 에이전트가 우리나라로 말하면 삼성같은 곳에 인맥이 있어서 Invitation letter를 받았고, 대사관에서 accept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하려면 사진이 긴급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조건은, 히잡을 쓰고 찍을 것.히잡을 어디서 구하나 했는데, 회사에 적십자 회원인 직원분이 계셔서 삼각건을 빌려 얼른 공도 사진관으로 갔다. (왠지 시골 분위기 사진관)
삼각건을 쓰고 찍는 나를 보고, 사진관 사장님은 아무말 없이 비자 사진을 찍어주셨고, 밝게 웃는 모습이 이쁘다며 상체를 담은 모습도 서비스로 찍어주셨다. (그림으로 그렸는데 너무 나같지가 않아서, 진짜 사진을 올렸다 ㅋㅋㅋㅋ)
그리고 사진을 찾아서 얼른 오토바이 택배로 대사관으로 사진을 보냈고, 비자를 성공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 출장에서 다녀왔을때, 설계부서 과장님께서 자리에 오셔서
"아니, 왜 xxx씨 사진이 공도 사진관에 걸려있지?"라고 하셨고,
그 사진을 구경하러 사진관에 다녀온 알밤같이 생긴 사수는 회사 사내 게시판에 이 스토리를 올려서 나를 열받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재밌는 일이지만)
더 황당했던건, 그 사진이 액자에 잘 걸려있었던게 아니라, 사진관 프린터에 '명암 조절용 사진'으로 붙어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은 나의 친한 친구가 너무 맘에 들어하며 가져갔는데, 성경책에 끼워놓고, 예배할때마다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고 한다.
집에서는 딸의 첫 해외 출장이다보니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히잡을 뒤집어 써야한다는 정보로 엄마는 동대문가서 까맣고 긴 천을 끊어오셨고 (처음에는 챠도르인줄..), 이란 가기 위해 환승한 말레이시아 공항에서부터 이것을 뒤집어썼다.
페르시아어로, 이슬람 교도 여성의 전통적 복장을 가리키는데 아라비아어로는 하바라(habara) 라고 하며 기혼 여성이 입는, 신체를 완전히 둘러싼 검은 천의 옷을 의미한다. 천은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재단하는데, 그것은 여성 신체의 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이집트 농촌부에서 여성은 외출할 때에 현재도 반드시 이를 두른다. 밀라야(milāya)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카이로의 서민계급의 여성은 현재도 이를 몸에 걸치며, 역시 외출시에 색깔있는 옷 위에 머리부터 완전히 뒤집어쓰고, 허리부근에서 말아 입는다. 젊은 처녀들은 밀라야를 허리에 딱 말아서 신체의 선을 일부러 과시하는 자도 있다. 이슬람에서는 여성의 신체는 손목부터 손끝까지와, 얼굴 이외에는 아우라(치부)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의 여성의 옷은 이런 종교적 의미에서 제한되며, 여성의 미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도록 되어 있다.
알고보니, 챠도르는 종교적인 의미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가리기 위해 쓰는 것이고 모던한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써서 머리 부분만 가리면 되는 것이었다.
처음만난 이란 에이전트 Amir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숙소로 가기전에 옷가게를 데려가 주었다. (아마 속으로 엄청 웃었을 듯)
거기서 난 Pretty woman 이라도 된 양, 여러벌의 옷을 골랐고, Amir는 계산했다. ㅋㅋㅋㅋ
이란은 총 두번을 갔는데, 처음에는 부사장님과 두번째는 사장님과 다녀왔다. 아미르와 찍은 사진은 아마도 두번째 사장님과 다녀왔을때의 사진일 것이다.
두번째 갔을때 이란은 겨울이었는데, 스키장을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하여 저런 복장으로 스키장에 다녀왔다. (사장님 양복 어쩔..)
스키장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쫓아와서 나한테 머라고 했는데, 내가 다리를 가리지 않고 바지만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란은 지금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다. 나도 중동국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이란을 방문했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Friendly 하고 따뜻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란의 여성들은 외출할 때만 가리고 다니지, 집에서 파티를 자주하는데 파티를 할때는 히잡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의 나라면, 페르시안 유적지를 꼭 다녀올텐데, 그 당시는 출장일정만 소화하는 것으로도 힘들었었다. (영어도 더듬더듬 잘 못하지만, 도움이 되어야 했기에 열심히 움직였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