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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세계여행 6화)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 3개월 가기 전

by 꿈꾸는 유목민


나에겐 정말 소중한 인생 인연이 있다. 바로 덴마크 아저씨 예스 (Jes 라고 쓰고 예스라고 읽는다)이다.


첫 회사에서 기타등등의 나라 중 덴마크의 고객이었다. 예스는 내가 입사했을때부터 고객이었다. 회사 사장님, 이사님들과 동갑이었는데 그 당시의 모습은 산타할아버지를 연상시켰고, 계속해서 산타 할아버지 같이 푸근했다. 예스는 내가 입사하기 전에 금형을 발주했고, 금형이 다 만들어져서 첫 사출 (금형을 만들고 플라스틱 제품을 처음 만들어 내는..) 에 한국으로 출장을 왔다.


푸근한 인상만큼 편하게 해줘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나보다 약 13살 정도 많았으니 나는 삼촌뻘 이라고 생각했다. 술자리도 같이 하고 내가 주말에는 관광도 시켜주었다.


기억하기로는 남산타워에 함께가서 남산타워 꼭대기의 회전레스토랑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예스는 농담을 많이 했는데, 물론 영어로 했고 나는 예스 영어의 반 이상을 못알아들었다. 하지만 농담을 하고 혼자 껄껄 웃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알아듣는 척하고 항상 함께 웃어주었다. 예스는 몇년에 한번 만나면 "You spoke horrible English at that time" (그때 정말 영어를 끔찍히도 못했어라고 의역....) 라고 한다.



예스는 유쾌했고 함께 있으면 상대방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밝고 푸근한 예스는 남들의 관점으로 보기에, 쉽지 않은 가족 환경이 있었다. 17살때 밴드 동아리에서 함께 있었던 리나와의 사이에서 결혼 전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태어난 첫째 아들은 지체장애인이다. 그리고 둘째딸은 중학교때 쯤 영국으로 기숙학교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따 같은 것을 당해서 정신 충격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예스의 와이프 리나, 그렇게 밝은 성격이 아니다. 여러나라 출장을 다니며 이것저것 다양한 걸 먹어보는 걸 좋아하는 예스와는 달리 리나는 살찔까 염려하여 거의 먹지 않았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예스의 특유의 밝음이 무얼까 지금도 궁금하긴 한데,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 덕분이 아닐까 한다. 따뜻함을 갖춘 철학자.


예스는 아직도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잊지 않고 가끔 영상통화도 하고, 9년 전 내 결혼식 때는 한국에 일부러 출장 스케줄을 만들어 방문하여 결혼식 축사를 (주례보다 두 배 길었던...- 내 동생이 통역) 해주었고, 3년 전에는 태국 여성분과 재혼을 해서 태국 결혼식에 우리 가족을 초대하기도 했다. (이건 후에 포스팅 예정이다)

내 결혼식에서 축사를 한 예스

아무튼, 예스는 내가 신입사원때 본격적으로 우리 회사에 발주를 하였다. 우리 회사는 주로 자동차에 들어가는 대형 금형을 만드는데, 예스가 주문하는 금형은 주로 플라스틱 제품같은 조그마한 제품이었다. 언제 한번은 한꺼번에 8개인가의 소형금형을 주문을 했는데, 윗 분들은 그 금형들을 외주를 주었다. 부천의 원미동쪽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담당이었기 때문에, 금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리하고 예스가 보낸 부품들을 그 업체로 가져가는 게 나의 임무였다.


어느날은 예스가 덴마크에서 금형에 들어가는 여러개의 부품을 회사로 보냈는데, 회사 앞마당에Delivery 가 되었었다. 그걸 공장안으로 옮겨야해서 현장에 계신 어떤 과장님께 부탁들 드렸는데 바쁘다며 냉정하게 거절하셨다. 첫 회사에서 경험한 첫번째 거절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는 화장실에 가서 혼자 펑펑 울고 부은 눈으로 자리에 앉았다. 밤톨 같이 생긴 사수가 그 말을 듣더니, 나를 데리고 나가서 지게차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수도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다. 현장 사람들과 사무실 사람들의 암묵적인 자존심 싸움 그런게 있었던 시기였다. 그래도, 지게차 운전하는 방법을 직접 배운건 너무 웃겨 ㅋㅋㅋㅋ


물론 그 이후에 지게차 운전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사수가 가르쳐준 방법은 나의 자심감 회복에 큰 도움이 된것같다. 안되는 것 없다. 그냥 하면 된다. 그게 지게차 운전이든, 눈길에서의 운전이든.


그 당시 네비게이션도 없는 시대라서 매일매일 부천 원미동에서 운전하며 헤매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고 나에겐 이 금형이라는 비지니스가 안맞구나..도 깨달았다.


해외영업이지만, 이를 Selling하려면 내가 파는 제품을 완벽하게 알아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금형은 나에게 너무도 어려운 제품이었다.


그래서 사수와 사장님께 퇴사의사를 밝혔다. 그 당시에 나는 퇴사 후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다. 대학교 3학년때 미국취업행도 좌절이 되고, 연수를 가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해외영업인데 영어를 잘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신했을 때 그린 민화 화조도 선물


하지만, 사장님께서는 나를 잡고 싶어하셨고, 내가 채용된 백그라운드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셨다. 원래 나를 해외영업을 시킬 생각이 없었고, 사수 혼자 해외영업을 하니 처리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서류 정리와 잡일을 시키려고 나를 뽑은것이다. 처음에 사장님은 영업에는 여자는 죽어도 안된다고 하셨지만 결국 이사님께 설득당해 그냥 기대없이 뽑았었는데, 내가 남자처럼(?) 영업을 잘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영업부 차장님이 지어주신 별명은 깡패)


예스가 그런 이유를 듣더니, 예스가 근무하는 우리회사와의 파트너쉽 덴마크 회사에 몇개월간 파견 근무를 보내는게 어떻겠느냐고 사장님께 제안을 했다 (솔직히 어떻게 그렇게 흘러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예스가 제안했는지, 아니면 내가 네고를 걸었는지..)


그렇게 해서, 덴마크에 가게 되었다. 덴마크 금형 회사에 가서 기술도 배우고 영업도 해오라는게 임무. 원래 약 4-5개월 일정이었는데, 3개월 안되게 정리하고 들어갔던 것같다.


덴마크에서의 경험은 평생 잊지못할 갚진 경험이었다. 덴마크를 베이스 캠프로 두고, 유럽 여러나라의 모토쇼나 플라스틱 전시회를 다녔고, 그 당시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는데, 느려 터지는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찾아보고, Cold E-mail 을 보내서 회사 소개를 하게 해 달라고 하고, 몇 군데서 연락이 와서 방문하기도 했다.

덴마크 회사에서 직원들과


영어는? 덴마크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가 다 되고, 예스랑 출퇴근하면서 나는 한국어를 먼저 생각하고 영어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을 꺼내고 되든 안되든 영어로 말하는 습관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틈히 덴마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지니스 클래스를 듣기도 했다.


덕분에 실전 영어가 아주 조큼 늘었던 것같다.


앞으로 쓸 몇 개의 기록은, 덴마크에서 기록과 덴마크를 베이스 캠프로 두고 다녔던 유럽의 여러나라에서의 에피소드를 담을 생각이다.



꿈꾸는 유목민

세계여행의 기록

덴마크 여행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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