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시간의 아버지로 묘사되는 크로노스는 '측정된 시간'을 상징한다. 카이로스란 그리스 신은 크로노스만큼 주목받지 못하지만 별개의 강력한 시간 개념을 상징한다. 크로노스가 시간의 아버지라면, 카이로스는 당신이 좀 더 자주 어울려야 하는 쿨한 삼촌이라고 하겠다.
"카이로스 신은 제우스의 막내아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기회의 혼령으로 보았다. 이솝이 묘사한 카이로스는 빨리 달리는 자로서 이마 위 머리 한줌을 빼고는 대머리여서 오로지 앞에서만 움켜잡을 수 있었다. 그것도 내게 다가올 때만 움켜잡을 수 있다. 지나간 후엔 제우스조차 그를 잡아당길 수 없다"
크로노스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타임오프 할 때,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사하게 된다. 시간을 경험하는 다른 방식에 접근할 기회를 얻는다. 시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순간순간 밀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토록 멋진 휴식/)
아이와 단둘이 떠난 뉴질랜드 캠핑카 여행의 초반부터 위기는 찾아왔다. 캠핑카에는 화장실이 있었지만, 아예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좁은 캠핑카에서 냄새도 문제였고, 오물을 처리할 마음과 능력을 장착하고 싶지 않았다.
여행의 중반, 내륙으로 이동하던 길에서 아이가 “엄마, 똥 마려워”라고 조용히 말했다. 차를 세우고 근처 마트와 카페를 조회했다. 목적지까지 주유소도 없었기에 기름도 빵빵하게 채웠다. 무엇보다 뉴질랜드는 부활절 휴가로 대부분의 상점, 카페, 마트 등이 문을 닫았다. 가끔 도로 옆에 있는 공중 화장실이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30분을 더 가면 잠시 후 문을 닫는 마트가 지도에 보여서 운전을 시작했다. 문제는 30분을 아이가 참을 수 있을까였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옆에서 호들갑을 부리는 게 아이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는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다.
즉, 진짜 급하다는 의미이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구글 지도에 ‘Toilet’으로 조회를 했다. 공중 화장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는 길 아이가 한마디 더 한다.
“캠핑카 화장실은 그래도 사용할 수 없네”
매정한 엄마라고 할 수 있지만, 화장실 안에 박혀있는 짐들을 정리하고 화장실 사용법을 알아내는 시간에 근처 화장실을 찾는 게 더 빠를 듯했다. 네비가 알려준 곳에 도착하니 “Fire Station”이었다.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있었으나 인기척조차 없는 곳이었다. 으스스했지만 차를 주차하고 건물 뒤편의 화장실을 발견했다. 아이를 얼른 화장실로 넣고 앞에서 기다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인적없이 여기저기 나무만 무성했고, 알 수 없는 동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캠핑카 안에서 기다리고 싶었지만, 화장실과 좀 거리가 있어서 꼼짝없이 서 있었다. 1분이 1시간 같았다.
‘지금쯤이면 나와야 하지 않나?’ 싶어 아이를 몇 번이나 아이를 재촉했다.
드디어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의 표정이 환했다.
“엄마, 나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무서움에 떨던 나까지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아이는 가장 위급한 상황이 10점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상황은 9점이라고 했다. 이제 아이가 말하는 점수로 위급상황을 가늠할 수 있으니 그것도 다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배 아픈 신호가 오면 참지 말고 바로 화장실에 다녀와야 이런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는 조언만 해줄 수 있었다.
위급할 뻔했던 상황 이외에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여행의 막바지에 클라이막스를 찍었다. 집에 가는 전날 테카포 호수에 도착했다. 온천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점심을 먹지 않고 바로 온천으로 향했다. 핸머 온천에는 3개의 대형 슬라이드가 있어 아이가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싸늘해진 가을날 테카포 온천은 아이에게 매력 없는 곳이었다.
테카포 호수 앞 트럭 맛집에서 엄청난 기름에 튀겨진 피쉬엔칩스와 오징어 튀김을 정신없이 먹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마침 날씨가 환상이었기에 산 위에서 맑은 테카포 호수를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복 1시간도 안 되는 곳이라길래 가기 싫다는 아이를 설득해 잣나무가 우거진 경사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날 따라 힘들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끌다시피 정상에 올랐다. 역시 오길 잘했다 싶었다.
한 바퀴를 돌면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해서 왔던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아이가 또 급똥을 외쳤다. 최고 10점에서 6점 정도라고 한다. 지난번 9점보다는 덜 긴급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중간에 우뚝 서버렸다. 걸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앞으로 20분 이상을 내려가야 하는데 나도 바짝 긴장되었다. 가방에는 티슈 한 장이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숲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을 정도로 열린 공간이었다. 아이는 화장지 한 장이며 된다며 아무 곳에서나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바지에 일을 봐도 된다고 아이에게 다른 옵션을 주었다. 장본인은 급하고 옆에 있는 나는 바짝 긴장했다. 10번 이상을 걷고 서고를 반복했을까, 드디어 캠핑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둘 다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다시 살아난 아이는 똥꼬에서 물이 계속 나왔는데 지금도 시원하지 않다고 했다.
“그거 설사인데?”
열 살 인생, 인지 능력이 생긴 후 설사는 처음 만난 듯했다. 급하게 먹은 기름기 가득한 튀김 음식이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럴 때는 속을 비워두는 게 좋을 듯해서 사 놓은 스테이크는 다음날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아이와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늘어간다. 특히 생리적 현상은 그러지 말라고 아이를 다그칠 수도, 기저귀를 떼기 전처럼 엄마가 대신 처리해줄 수도 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Emergency’다. 아이가 클수록 급똥 상황이 늘어나지만, 대비보다는 대응할 수밖에 없다. 일어날 당시에는 심각하지만 해결되고 나면 추억이 된다.
문득, 작년 여름 아이와 함께 갔던 치앙마이 여행이 생각났다. 치앙마이 숙소에서 스포츠 센터에 가는 길, 5 분만에 아이는 "Emergency!"를 외쳤다.
"그니까,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처리하고 나오라니까"
"아니, 나오기 전에는 안 마려웠지!"
"똥 마렵구나, 어쩌냐…. 우리 20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데, 지금 숙소에 들렀다가 가면 늦는데, 좀 참아봐"
열심히 걸어가는 아이가 왜 이렇게 머냐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토록 멋진 휴식>에서 읽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리스 신 중에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거든?"
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귀를 쫑긋했다.
“크로노스 신은 시간의 아버지라 불리지. 우리가 매일 보는 시계 있잖아. 달력, 분, 초, 시간, 알람시계 등등 정확한 시간을 나타내는 게 바로 크로노스의 신이야. 반면에 카이로스의 신은 음.. 뭐냐면, 예를 들어 학교에서 지루한 수업시간은 시간이 잘 안 가고, 애들하고 놀거나 게임을 하면 시간이 엄청 빨리 간다고 느끼잖아? 그게 카이로스의 시간이야. 반대로 지금 네가 똥이 마려워서 거리도 엄청 멀게 느껴지고, 시간도 안 간다고 생각하잖아? 그것도 카이로스의 시간이지. 우리가 스포츠 센터까지 가는 거리는 어제랑 오늘이랑 같아. 그러니까 시간도 같은 거지. 다만 네가 느끼는 시간이 다른 것뿐이지”
급똥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 솔직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기도 하지만 지나고 나니 두고두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