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나는 내 우주의 중심이다! 내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내가 발산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나는 내가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나는 인생에서 최상의 것과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당장 건강, 성공, 행복을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당장 나 자신과 인류를 위해 풍요를 선택한다. (금가루 수업/캐서린 폰더/p45)
스물아홉, 취업해서 말레이시아 페낭에 가기 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힘든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착각을 했고, 아버지 사업은 날이 갈수록 기울어졌다. 새로운 삶을 찾아 해외로 간다기보다 도망간다는 말이 더 맞았다. 한국에서 가본 적 없는 펍 문화를 페낭에서는 즐기고, 일도 열심히 배우는 동안 여동생은 캐나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직장을 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더욱더 기울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마냥 페낭의 삶이 즐거울 수는 없었다.
함께 사는 언니에게 ‘우리 부모님이 페낭에 오셔서 홈스테이를 운영하시면 어떨까?’ 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말레이시아 페낭은 가족이 함께 살기에 좋은 나라이니 괜찮을 거라 했다. 고민하고 있던 바를 다른 사람도 인정해주니 감사했다. 바로 집에 가서 부모님께 전화로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처음에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해 버리셨다. 얼마 후 한국으로 2주간 휴가를 갔다. 휴가 2주 동안 가족은 페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어렵게 결정했다. 말레이시아행을 결정하자마자 은행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의 집은 내가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기 이틀 전 밤 11시에 팔렸다. (아파트는 엄마가 분양받아서 마련하신 정말 소중한 집이었는데, 우리가 판 이후에 엄청 올라서 엄마가 한동안 너무 힘들어하셨다) 여동생은 원래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 혼자 한국에 있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재취업이 쉽지 않아 결국에는 가족 모두가 페낭으로 오기로 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나는 가족이 페낭으로 오기 전 함께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살고 있었던 콘도건물에 집이 있었고, 바로 계약했다. 월세 약 45만 원에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가 딸린 집이었다. 3개월 월세를 한꺼번에 보증금으로 내고, 다달이 월세를 내면 되었다. 문제는 당시에 돈이 조금 모자랐다. 2주마다 들어오는 월급날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3달 치의 월급이 한꺼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나처럼 3달 치 월급을 한꺼번에 받은 사람이 몇 있었다. 회사의 실수로 한꺼번에 월급이 입금된 것이다. 회사에서는 받아야 할 금액을 제외하고 직원이 다시 입금해 주거나, 다음 회차 월급에서 조금씩 차감해서 받는 방법을 제안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누구에게도 돈을 빌리지 않고 콘도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가족은 무사히 페낭에 왔다. 여동생은 메니저의 배려로 인터뷰 없이 같은 한국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중고차를 샀고, 나는 부모님을 한인교회에 살포시 넣어드렸다. 젊은 사람들이야 한인 사회에 꼭 속하지 않아도 되지만, 부모님 세대는 각 지역 한인교회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낭 한인교회 목사님 부부는 진심 좋으셨고, 부모님은 페낭 교회에 잘 적응하셨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실 때 기독교라고 하기에는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지 않아 무교에 가까웠다. 그런데 페낭에 사시는 동안 절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모하셨다. 부모님은 7년 동안 교회 분께서 운영하시는 사업체에 직원으로 등록해주셨다. 몇 년간은 문제없이 지내셨고, 그 이후에는 태국으로 3개월마다 비자 여행을 다녀오셨는데, (말레이시아 무비자가 3개월마다 갱신해야 했기 때문에) 이때는 나도 경험해보지 못한 태국으로 왕복하는 침대 기차도 타보시고, 코 사무이에 신혼여행처럼 다녀오시기도 했다.
부모님이 페낭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같은 팀 동료가 한국팀을 위한 점심 도시락을 부모님께서 싸 주실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다들 싱글이라 밥을 해 먹기도 하고, 외식도 했지만, 모두 집밥이 그리울 때였다. 부모님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셨고, 도시락통과 도시락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까지 사 매일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한국팀은 모두 15명이었다. 아침에 내가 도시락 주문을 받아서 전달했고, 부모님은 11시 30분까지 회사 게이트 앞으로 도시락을 가져오셨다. 직장동료들은 점심시간마다 모여서 회사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런데 중국 동료들이 한국 도시락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에 주문량이 40개가 넘을 때도 있었다. 부모님은 매일 아침 시장에 가셔서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사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셨다. 가장 인기 있는 반찬은 돼지고기 김치 두루치기와 비빔밥이었다. 동생과 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나가서 도시락을 가지러나 가야 해서 번거로웠지만, 부모님께서는 도시락준비로 한 달 생활비를 마련하실 수 있었다. (도시락 하나에 10링깃 – 3천 원 정도….)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만둣가게를 했는데, 그때의 경험과 기술로 아버지는 만두를 만드셨고, 부모님은 우리 회사에서나 교회에서 비정기적으로 만두 주문을 받았다.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합산해보니 부모님이 가지고 있었던 돈을 까먹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가족이 페낭에 온 1년 후 나는 한국에 돌아왔고, 동생은 2년 후, 부모님은 7년 정도 더 계시다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비자 문제와 아버지 건강문제로 더 계실 수 없었다) 부모님은 페낭에 있는 산이나 해변을 누비셨다. 어느 날은 산을 오르다가 중국 청년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집으로 초대를 받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페북으로 안부를 묻는다)
우리 가족에게 말레이시아 페낭이란, 변화, 놀라움, 만남, 즐거움, 감사함, 경험 등 모든 기억의 장소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온 가족이 돈에 쪼들려 살았던 시기라 힘들다고만 생각했다. 가난한 건 상태였을 뿐이지 돌이켜보면 충분히 모든 일이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페낭에 가기 훨씬 이전에 엄마가 수원역에서 용하다는 곳에서 사주를 봤는데, ‘딸 덕에 해외에서 살겠네요’라는 사주 선생님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고 엄마는 회상했다. 내 안의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믿음은 말레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가족을 말레이시아에 데리고 오겠다는 결정, 집을 마련할 돈은 어떻게든 구해질 거라는 결정, 부모님이 잘 적응하리라는 결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결정 등은 작지만 대부분 이뤄졌다. 그때가 바로 인생에서 최상의 것과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시작한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