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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출장에서 겪은 기묘한 밤, "문을 열고 나가봐"…

다시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by 꿈꾸는 유목민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 p13)


첫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 캐나다 어학연수에서 돌아와 서울 어느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사장님은 여성분이셨는데 제조회사라 그랬는지 첫인상은 닮고 싶은 여성 CEO의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나는 해외 에이전트를 관리했고, 첫 직장과는 다르게 해외 출장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홍콩에 해외 전시회를 갔다. 괜찮은 회사가 아니었던지라 나는 여사장님과 같은 호텔방에 묵었다. 이 전에 사장님과 업무적으로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에 더 어색했다. 전시회 일정을 마치고, 사장님이 야경으로 유명하다는 어느 펍에 직원들을 데리고 갔다. 이후에는 호텔 방에서 속옷 차림의 사장님과 바닥에 앉아서 미니바의 술을 다 꺼내서 함께 마셨다. 사람들이 홍콩을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별 감흥이 없었던 걸 보면 쇼핑, 빌딩 숲, 도시라는 키워드보다는 자연을 더 좋아하는 기호가 확실했다. 홍콩은 내 돈 주고 갈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10년 후, 다른 회사에서 홍콩 출장일정이 잡혔다. 2주 동안 중국 소주-상해-홍콩-말레이시아-싱가폴을 일주하는 출장이었다. 직장동료 두 분을 포함해 셋이 함께하는 출장이었고, 함께 간 두 분은 사내에서도 재미없기로 소문난 분들이셨다. 관광과 업무 모두 조용히 다녔다. 홍콩에 도착한 지 이틀째, 내 생일이었다. 두 분에게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라고 말했고, 두 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셨다. 우리 셋의 머리 위로 까마귀가 깍깍하며 날아다녔다. 중국과 동남아 선사에 출장 다니던 시절에 나는 협력사 직원이었지만, 두 분은 내가 대기업 정직원으로 입사할 수 있게 도와주고 격려해주신 아주 좋은 분들이다. 다만, 두 분은 누군가를 축하해주는 상황을 어색해하는 츤드레의 캐릭터를 가지신 분들일 뿐이다. 하지만 내 생일이라는 말이 마음에 쓰이셨던지 차장님께서는 석양을 보러 심사츄이에 가자고 하셨다. 재미없는 두 동료분과 저녁을 먹고 석양을 보며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심사츄이 식당에서 차장님이 가방을 두고 오는 바람에 다시 찾으러 배 타고 가는 길에 본 무지개는 행운의 상징이었다. 무지개는 행운의 의미라 차장님은 가방을 찾았다. 여기서 끝났으면 내 생일은 재미없는 홍콩 출장의 기억과 함께 잊혔을 것이다.


생일인 만큼 밤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출장 때 하나 씩 챙기는 이쁜 원피스로 갈아입고, 혼자 무작정 호텔 밖으로 나왔다. 홍콩의 거리는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거리마다 높은 건물들로 다 막혀있어, 답답했다. 두리번거리며 펍을 찾았지만, 말레이시아에 살았을 때처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한 시간쯤 걷다가 펍 찾기를 포기하고 보이는 편의점에서 와인 한 병을 샀다. 호텔 방에 들어가서 혼자 홀짝 홀짝이 아닌 벌컥벌컥 와인을 마셨다. 와인을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알딸딸해진 상태에서 소개팅에서 만나 썸 타던 남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 취해서 그랬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몇 시가 되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술김에 눈을 떴는데 누군가가 내 호텔 방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호텔 방 밖으로 나가면, 내가 호텔 방문을 다시 열어줄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한 번 나가봐, 내가 방문을 열어주는지"

"아 그래? 한번 그래 볼까?"

난 맨발로 호텔 방 문을 열고 나서, 문을 닫았다.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아! 나 누구랑 이야기한 거지? 난 왜 나온 거지?’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맨발인 상태로 로비로 갔다.

"뭘 도와줄까?"

"키를 안 갖고 호텔 방문을 닫고 나와버렸어."

"아 그래? 그럼 너의 생년월일을 말해줄래?"

"응.. 안예진, 그리고 오늘"

"응?"

"내 생일은…. 오늘이야"

직원은 웃으며 생일 축하를 해 주었고, 호텔 방 카드키를 만들어 내게 주었다. 생각할수록 정말 정말 다행인 건 맨발이었을 뿐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몸에 열이 나 자주 옷을 벗고 잘 때가 많았던 젊은 시절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홍콩 귀신을 만났다. 술에 취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로 행동했다니 장난꾸러기 홍콩 귀신한테 걸렸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비현실적이지만 생생한 체험을 떠올리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 된 그레고르가 겪은 일처럼 믿을 수 없는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덧, 술에 취해 사용한 전화는 함께 출장 간 차장님의 명의로 되어있는 회사 비즈폰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휴대폰 요금이 200만 원이 넘게 나와 차장님께서 추궁을 당하셨다고 한다. (인제 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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