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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여자보다 낫다고? 싱가포르는 여전히 별로다.

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by 꿈꾸는 유목민

여행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는 한사람, 한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어떤 장소만이 던져주는 질문, 어떤 장소만이 느끼게 하는 감정, 어떤 장소만이 떠올려 다시 기억나게 하는 내면의 소중한 것들이 있다. (내게 말을 거는 여행의 장소/우지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 살 때는 싱가포르에 동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항공사 담요를 친친 감아도 오돌오돌 밤새 떨어야 하는 버스를 타고 싱가포르에 도착하면 도시의 공기가 느껴진다며 신나게 돌아다닌 적도 몇 번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적은 월급을 받아도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가 있는 콘도 렌트를 할 수 있었고, 자차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보다 조금 높은 월급을 받아 작은 방 한 칸 렌트비로 지급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싱글은 도시에 대한 로망이 있다. 다국적 기업이 모여 있는 싱가포르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곳에 꼭 숨겨진 내 짝꿍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마디로 소설을 많이 읽은 자의 망상이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부모님을 두고 한국에 돌아가 결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미친 듯이 운동하고 다이어트하며 뺀 살은 한국에서 밤새 이어진 술자리와 새벽 해장 감자탕으로 원상 복구되고 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는 그렇게 한국에 돌아가고 싶더니, 한국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듯 해외로 다시 나가고 싶어 안달했다. 100번의 이력서를 넣고 간신히 합격한 미국계 한국 회사에 너무 금방 적응해버리기도 했고, 여직원을 비서로만 생각하는 이상한 회사에서 견딜 수 없었다. 싱가포르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고, 합격해 짐을 싸 다시 해외로 나갔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라고 스스로 세뇌하며 라꾸라꾸 침대에 몸을 누이면 양쪽 벽이 손에 닿는 작은 방을 얻어 지냈다. 방의 크기에 따라 자존감도 낮아지는지 하우스 메이트들을 피해 다녔다. 직장에서도 한국인이라는 특수성으로 처음에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싱가포르 직원들은 함께 점심을 먹을 때도 중국어로만 대화했다. 사람들 속에서 소외되었고, 싱가포르 사람 특유의 이간질에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술 마시고 노래방 가는 한국의 회식 문화를 피한 줄 알았는데, 노래방에서 밥과 술을 함께 먹으며 노래도 불러야 했다. 다섯 명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장실을 함께 쓰는 커플은 자신들의 방과 연결된 화장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 한 달 동안 하혈을 했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초반만 지나면 모든 마법이 사라져버린다. 사는 곳을 이동하는 일은 초반에는 삶에 활력을 줄지 모르지만, 마법이 사라져버리면 삶은 예전과 같이 흐른다. 싱가포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싱가포르에서 직장생활하는 동안 부정적인 생각과 말은 나를 병들게 했다. 그즈음이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 동안 캐나다 어학 연수할 때 잠시 룸메이트였던 아는 동생과 메신저로 안부를 묻다가 본인이 하는 일이 나에게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대기업 본사의 협력사 직원으로 근무하며 본사 직원 자격으로 해외에 나가 해외직원들을 교육하는 업무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는 미국계 회사에서 근무할 때 본사에서 출장 나와 해외직원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직원을 보며 본사 직원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열망했다. 더 물어보지도 않고 이력서를 넣었고 대기업 협력사 사장님과의 전화인터뷰도 통과했다. 싱가포르에서 잘 지냈다면,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한국으로 돌아가 나는 날개를 달았다. 대기업에서 국내 프로젝트를 성실히 수행하며 협력사 직원이었지만 인정도 받았고, 다음 유럽 프로젝트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싱가포르가 주요 거점이었다. 몇 년 전 싱가포르 좁은 방에서 살 때와는 다르게 시내 중심지 좋은 호텔에서 5개월간 지냈다. 내 자존감도 함께 올라가는 듯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본사에 있을 때 자주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따라주는 술을 마셨던 날도 많았다. 술을 마시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주는 대로 받아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엔 소주를 입에 잔뜩 머금고 있다가 화장지를 뽑아 뱉어내기도 하고, 부서장이 다른 직원 술을 먹이려고 잠시 한눈을 팔 때면 바닥에 쏟아 버리기도 했다. 정신을 붙들어 다른 직원들과 상사가 술에 취하면 내 잔에는 소주 대신 물을 따랐다. 땅이 올라오는 느낌으로 비틀거리며 밤늦게 집에 돌아가고, 다음날은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상사한테 찍히지 않았다. 출장지에는 문제의 부서장이 없으니 술로 인해 생활이 힘들어졌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끔 본사에서 윗사람들이 출장을 나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프로젝트 중간 싱가포르 거점으로 본사 K 상무가 왔다. 협력사 직원이 대기업의 상무를 만날 일이 없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저녁을 먹고 호텔 방에 들어가자 전화벨이 울렸다. 다른 부서의 과장이었다. 자신의 직속 상사인 K 상무가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며 바로 나오라고 했다. 나가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협력사 여직원들과 술자리에 나갔다. 옆에 냇물이 흐르는 오픈되어있는 바였다. 어색하고 재미없는 술자리였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K 상무의 딱 한 마디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술집에 가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돼. 돈을 안 들이고도 여자들하고 술을 마실 수 있는데”

함께 간 협력사 직원들과 혐오의 눈빛을 교환했던 그 순간까지도.


한국에 돌아와서 K 상무와의 술자리 회식에 한 번 더 불려간 적이 있다. 부서장은 상무의 양 옆자리는 술을 잘 마시는 협력사 여직원들을 배치했다. 다행히 나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해 다른 자리에 배치되었다. 막걸리, 소주, 맥주와 비싼 위스키를 섞어 마시며 대부분의 직원들이 인사불성이 되었던 그 날 밤, 2차는 노래방이었다. 노래방에 도착했을 때 K 상무는 지금은 다른 누군가의 아내가 된 다른 협력사 여직원들을 끌어안고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리 블루스였다. 다른 남자 직원들이 노래방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집으로 돌려보낸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닌다.


<내게 말을 거는 여행의 장소>에서 언급했듯 ‘어떤 장소만이 던져주는 질문, 어떤 장소만이 느끼게 하는 감정, 어떤 장소만이 떠올려 다시 기억나게 하는 내면의 소중한 것들이’ 있지만, 어떤 장소는 아픔이고 끝까지 소중할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1년 후 짧은 싱가포르 출장에서 나는 같은 호텔에 머물렀다. 싱가포르 지인을 만나고 돌아와 호텔 방에 올라가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침묵하던 건너편에서 한국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텔 방에 올라가는 거 봤어요. 술 한잔 같이할래요?”


이러니, 내가 싱가포르를 좋아할 수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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