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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 각 1병, 아이슬란드 화산폭발, 폴란드

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

by 꿈꾸는 유목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중략)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빅터 프랭클/p229)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언어도, 사람도, 상황도 바꿀 수 없을 때 태도를 바꾼 당신의 선택


전 세계 시스템 통합 프로젝트의 마지막은 폴란드였다. 이미 네 번의 Go-live (적용)을 한 터라 직원들은 베테랑이 되어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임했다. 위치는 폴란드 포즈난 이라는 곳이었고, 호텔은 옛 마구간을 개조한 곳이었는데, 프로젝트팀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 영업을 시작한 곳이었다. 천장이 유리로 뚫려있었고, 모든 식기류가 고급스러운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같은 호텔 안에는 오픈된 와인 창고가 있고, 엄청난 양의 와인이 쌓여있는 한쪽에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판매했다.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는 정말 일품이었다. 술꾼이었던 함께 출장 간 IT 담당과 창고의 모든 와인을 맛보리라는 일념으로 하루에 한 병씩 와인을 마셨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행오버 따위는 없었다.


반면 프로젝트는 순탄하지 않았다. 인수하기 전 회사에서 보낸 인력의 대부분 영어를 못했고, 교육을 위한 노트북도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포즈난에는 한국어학과가 있는 대학교가 있었는데, 한국어를 배운 학생들이 통역 아르바이트였다. 한국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여학생도 있었다. 폴란드인이면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인력이 매력적일 수 있으나, 전문 인력이 아닌 한국어를 걸음마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전 작업'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었는데, 한국어학과 학생들은 이를 'Dictionary work'로 통역했다. 내가 교육을 담당한 인력은 40대 아주머니로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조금만 건들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교육에 참여했다. 생계를 위해서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그런 아주머니의 인상이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하지 못하는 분이었기에 통역이 필요했다. 통역 아르바이트 학생이 잠시 통역을 담당했다. 하지만 아주 쉬운 한국어로 설명을 했는데, 통역이 제대로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어가 더 쉽나요?"

"네"

그래서 영어로 아주 쉽게 이야기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대부분 통역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가 너무 어렵다며 거의 그만두었다.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내 태도를 바꾸리라는 일념으로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커뮤니케이션했다. 교육생 아주머니는 다행히 첫날 울 것 같은 표정을 버리고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영어를 잘 하는 통역을 통해 교육과 테스트 진도가 나갔다. 통역을 잘 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그대로 옮기지 않고 통역이 필요한 언어로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얼마 후 대학을 졸업한 폴란드 남자 직원이 들어와 통역 프리랜서는 다른 쪽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 겪어야 했던 곤란한 상황을 다시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젊은 남자 직원은 사회성은 좋았으나 시스템 이해 능력이나 일머리는 부족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전달해줘야 하는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아주머니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시스템을 새로 배우려고 하는데, 말도 잘 안 통하고, 남자 직원을 통해 질문하면 자신이 질문한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안 돌아오고,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나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 아주머니는 많이 우셨다. 나는 한국인 메니저에게 지속해서 이런 어려움을 어필했고, 대학을 방금 졸업한 카샤라는 여직원을 뽑았다. 카샤를 왜 뽑았냐고 했더니, 이쁜 순으로 뽑았다고 했다. 정말 황당한 이유이긴 했는데, 카샤는 영어도 잘했고, 성격도 좋아서 아주머니에게 내가 설명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설명해주며 자신의 실력도 업그레이드하는 아주 유능한 직원이었다. 폴란드 프로젝트는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 중 가장 보람차고 행복했던 출장이었다. 일도 열심히 했고, 억지로 참여하는 술자리가 아니라 즐겁게 술도 많이 마시고 주말마다 열심히 여행도 다녔다.


일도 여행도 즐겁게 했던 폴란드 프로젝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어느 날, 본사 사업부에서 출장 나온 분들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포즈난 광장 지하에 있는 동유럽다운 맥줏집에 6명이 둘러앉았다. 맛있는 맥주와 비슷한 세대였던 일행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술자리 게임을 시작했다. 다소 요란스러웠지만, 눈치 게임에 흠뻑 빠졌고, 술에도 흠뻑 취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가야 하는 2차를 갔다. 타로를 봐도 될 것 같은 분위기의 보드카를 파는 술집이었다. 보드카를 주문했고, 술에 흠뻑 취한 일행은 벌칙 없이 그냥 막 마시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파할 때 보드카 병 수를 세어보니 빈 병이 다섯 병이었다. 중간에 도망간 한 명을 제외하면 다섯 명이 각 한 병의 보드카를 마신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보드카 각 일병이다. 자정쯤 호텔에 돌아왔고,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출장자들은 토요일에도 출근해야 했다. 버스가 오전 7시에 호텔 앞에서 출발하니 그 전에 아침 식사를 마쳐야 하는데 아침 식사를 하며 둘러보니 함께 보드카 각 일병을 마셨던 분들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안예진 과장이 전날 엄청난 맥주와 보드카 한 병을 마시고도 아침 식사를 했다고 제보했고, 나는 보드카의 최강자가 되었다. 함께 출장 온 IT 동료와 마셨던 하루에 한 병 와인으로 단련된 몸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한국으로 복귀전까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폴란드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2주 후 결산을 해야 해서 다시 폴란드에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했다. 모든 항로가 막히고 폴란드에 남아 있던 출장자들은 발목이 묶이거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먼 거리를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아이슬란드 화산폭발이 멈추고 화산재만 하늘을 떠돌던 무렵 목숨을 걸고 폴란드에 다시 출장을 갈 것이냐, 아니면 가지 않을 것이냐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소중한 내 목숨이라며 출장을 가지 않는 걸 택했겠지만 폴란드 출장은 다시 가고 싶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폴란드 포즈난까지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데 프로펠러 비행기는 화산재가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주변의 이야기에도 목숨 걸고 폴란드로 다시 갔다. 목숨 걸고 갔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결산도 잘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지금이라면 갖은 이유를 대며 가지 않을 목숨이 걸려있는 폴란드 출장이었지만, 그때는 호기였을까 상황을 바꾸는 태도였을까. 털어놓지 못할 비밀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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