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30대 초반 말레이시아에 살 때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을 읽으며 설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망하면 바로 이루어질 듯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미국 본사에서 출장 나온 프로세스 전문가를 보며, 출장지에서 다양한 나라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소원은 2년 후에 이루어졌다. 대기업 협력사 직원이었지만 본사 자격으로 해외 곳곳을 돌며 다양한 나라의 직원들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했고, 천직을 찾았다 생각했다.
가장 열정적으로 임했던 곳은 베트남과 헝가리였고, 기대만큼 성과는 미치지 못했지만 멋진 동료들을 만났기에 직장생활의 전성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고객과 함께한 프로젝트는 브라질을 거쳐 인도로 이어졌다. 유쾌하지만은 않은 인도 출장을 마치고 바로 베트남 호치민 한 달 출장일정이 잡혔다. 부서장 눈치 보느라 집에 가지 못하고 인천공항에 도착해 바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신혼이었는데 내가 브라질 출장 중에 남편 혼자 집 계약을 했고, 베트남 출장 중에는 남편 혼자 이사를 했다. 그만큼 일에 진심이었다. 베트남 호치민 쉐라톤 호텔에 한 달간 머물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시작은 좋았던 베트남 출장업무는 쉽지 않았다. 시스템, 프로세스도 처음 세트업 해야 했고, 전 직원을 새로 뽑아 교육까지 해야 했다. 시스템과 프로세스는 회사의 방침대로, 혹은 고객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해가면 되지만 새로운 직원을 뽑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후에도 경험했지만 급하게 뽑던, 시간을 두고 뽑던 직원을 채용하는 일은 복불복에 가깝다. 사람이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업무 센스를 가진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안타까운 건 뽑아놓고 교육 시간을 거친 후 업무 센스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조건 뽑았다. 인건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저렴했지만, 거점에서는 인건비를 더 줄일 수 있게 신입 사원을 뽑았으면 했다. 감으로 채용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IT 직원은 인력 자체가 귀해 영어를 하지 못해도 바로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에 채용된 인원은 일곱 명이었다. 정식 이력서 없이 직원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신규 직원들은 채용 프로세스를 위해 이력서를 써야 했다. 이력서 이외에 설문 문항 중 ‘우리 회사와 관련된 사람을 쓰시오’라는 질문이 있었다. 대부분이 없다고 적었는데, 한 명이 적은 대답을 보고 우리는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xx 회사 앞 건물에서 일한 적 있음”
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가 애플 건물 앞에 있는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와 같은 대답이었다. 우려 속에 뽑힌 베트남 직원들은 교육에도 열심히 임했고, 야근해서라도 과제를 마치고 집에 갔다. 베트남 사람들의 근면 성실함은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고 한다. 격하게 동의한다. 새로 채용된 직원들은 서로가 배우고 가르쳤으며 무엇보다 사무실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신규 직원들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함께 프로젝트를 간 멤버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나는 주차장에 나와 몰래 울다가 고객사 차장님께 들키기도 했다. 본사 인사에서 상황을 보러 급히 베트남으로 왔고, 그 이후 프로젝트 메니저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신규로 거점이 추가될 때마다 우리는 고객으로부터 품질 검사를 받아야 했다. 품질 검사에 떨어지면 지금까지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압박감은 갈수록 심해져, 결전의 날이 다가올수록 호텔 계단에서 굴러서 다리가 부러지는 상상을 했다. 내가 포기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고로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처음 방문한 베트남에서 여행 한 번 하지 못하고, 주말에도 쉬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심했던 프로젝트였다. 품질 테스트는 통과했다. 마지막에 내가 욕심부린 것보다 결과가 좀 덜 나오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끝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었다.
베트남 출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품질 테스트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베트남 직원들이 모여 작은 선물과 함께 나를 앞에 앉혀두고 합창했다. 영화 ‘천밀밀’ OST인 내가 좋아하는 ‘월량대표아적심’이다. 지금도 영상으로 갖고 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선생님이라며 나를 잘 따라 준 베트남 직원들 덕분에 스트레스 가득한 고행 프로젝트가 사람을 얻은 행복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입 사원으로 시작한 베트남 직원들은 메니저가 되었고, 내가 퇴사하기 전까지 나를 ‘선생님’으로 불러주었다. 결국에는 사람이 남는다. 연락은 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기억 속에 박제되어있기 때문이다. 열정적이고 사람에게 진심이었던 나를 떠올리며 지금도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