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헝가리 출장을 2주일 정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팔의 통증이 심해졌다. 육중하게 태어난 조카를 매일 방문해 안아주었기 때문에 통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아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려다가, 통증이 심해져 회사 근처 작은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오른팔 어깨부터 팔꿈치까지의 뼈가 물로 가득 차 넘어지거나 조금만 충격이 가해지면 바로 골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며 본인도 수술은 할 수 있지만, 큰 병원을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판교에 있는 어떤 정형외과 전문병원에서 앰뷸런스가 왔다. MRI를 찍고, 바로 결과를 본 의사는 물로찬 팔에 인공뼈를 이식해야 한다며 보험이 되는지 확인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회사로 돌아가 함께 출장 가는 차장님께 이야기했더니, 나에게 본인의 일처럼 화를 냈다. 본인도 작은 병원에서 큰 수술을 했다가 합병증으로 보상도 못 받고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다며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라고 했다. 해당 분야의 전문의를 수소문해서 가까운 시일 내로 예약 일정을 잡았다. 예약하며 당장 팔이 부러질 것처럼 이야기했더니, 예약 담당자는 대부분이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출장은 취소하고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이전에 찍은 MRI와 추가로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다행히 악성 종양은 아니었다. 분당서울대병원 의사는 "지금 수술하지 않고 부러질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네?? 부러질 때까지 기다리라고요? 그럼 출장도 갈 수 있나요? 그럼 아이도 낳을 수 있나요?"
"네, 부러지면 오세요."라며 예정대로 출장을 가도 된다고 했다. 다만 팔로 하는 운동인 테니스, 수영, 골프등은 지양하라고 주의를 받았다. 수술을 잡아서 출장을 취소했는데, 출장 취소한 걸 다시 취소하고 우여곡절 끝에 헝가리 출장을 갔다. 나만 일주일 정도 늦게 도착했다. 출장 멤버들은 무거운 짐뿐 아니라 남편도 들어주지 않는 핸드백도 들어주었다. 처음으로 공주 대접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헝가리 출장은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 동시에 시작한 슬로바키아 프로젝트보다 훨씬 복잡한 프로세스와 몇십 배나 많은 업체를 교육하고 관리하는 프로세스도 만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메니저만 제외하고 함께 간 멤버들과는 완벽할 정도로 잘 맞았다. 주중에는 협업하며 열심히 업무를 했고, 주말에는 아름다운 가까운 유럽 나라를 돌아다니며 안구 정화를 했다.
난관은 직원 교육이었다. 헝가리에 있는 거점은 시내인 부다페스트에서 꽉 채워 한 시간을 운전해야 도착할 수 있는 시골이었고, 영어를 하고 업무 센스가 있는 직원을 채용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손짓 발짓을 동원하고, 직접 시범을 보이며 교육할 수밖에 없었다. K와 G는 내가 교육했던 직원들이다. 그들은 우리 회사가 헝가리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고객사에서 넘어온 인력이었다. 예전에 폴란드에서도 경험했지만, 고객사에서 양질의 인력을 넘겨줄 리가 없다. 대부분이 영어에 서투르거나 아예 하지 못했는데, 다행스럽게도 K는 영어를 잘했다. 발음도 클리어하고, 통역도 꽤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딱 영어만 잘 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엄청난 길이의 속눈썹을 붙이고 출근한다는 건 성실성을 대변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녀가 담당해야 할 업무는 그녀에게 너무도 어려웠다. 또 다른 직원인 G는 영어를 못해서 K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K도 시스템과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기에 명확하게 전달을 하지는 못했다. 이럴 때는 생각하지 않고 끝없는 반복으로 중간은 가게 만들어야 했다. K와 G를 끌어당기면서 시스템 테스트를 무한 반복하며 난도를 높여나갔다. 중간중간 K가 울면서 뛰쳐나간 적도, G는 줄담배를 뻑뻑 피운 적도 많았다. 그 이후에도 교육생들을 여러 번 울렸는데, 내가 독해서가 아니라 회사에서 만든 어려운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테스트를 무한 반복시킨 덕에 고객사 품질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긴 했는데, Go live 이후가 문제였다. 첫 월말 결산의 날 K, G와 함께 이틀 밤을 새운 후 결산을 무사히 마쳤고, 우리는 엄청 끈끈해졌다. 헝가리를 떠나기 전 K, G와 함께 부다페스트 뒷골목의 맛집 '체스'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는 K와 G, 그들은 정말이지 순수 청년들이었다.
본사로 복귀한 몇 개월 후 K는 퇴사 후 터키로 가서 여행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밤을 새우며 교육한 일이 까마득했지만 나는 무릎 치며! ‘너에게 맞는 일을 찾았구나!’ 하고 속으로 응원해 주었다. 본인이 해서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티나는 회사 일이 맞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기억이 나는데, K와 G를 교육하다 도저히 안 되어서 업무 센스 있는 직원인 L을 교육 했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서 거점의 메니저에게 잘 키우면 되겠다고 했는데, 너무 컸다. 몇 년 후 L은 지점의 주요 인력이 되어 다른 직원에게 노하우를 전수하지 않고, 이를 연봉협상의 도구로 활용했다. 프로젝트 때 첫 고용된 L은 야간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월급으로 500 유로를 받으며 혹사당하는 자기는 노예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회사입장에서는 괘씸하지만 개인의 성장으로는 축하할 일이다.
십수 년 지난 지금도 내 출장 인생 최고 전성기였던 헝가리를 생각하며 친구처럼 혹은 스승과 제자처럼 지냈던 일을 ‘라떼’가 되어 말하곤 한다. 세월은 지났고, 그 자리의 동료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테지만 추억은 내가 헝가리를 떠날 때 직원들이 만들어준 롤링 페이퍼처럼 박제되어있다.
"We love YEOJIN in Hungary in 2013"
아직도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