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리핀에서는 wake up call을 부탁하지 마세요

by 꿈꾸는 유목민

결혼하고, 1년에 250일 이상을 해외 출장지에 있었다. 출장 복귀 후에는 남편이 어색해서 다시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시 친해지기 전 출장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음 해에 프로젝트팀에서 벗어나 출장이 비교적 적은 운영팀으로 부서를 옮겼고, 여전히 출장은 가야했다. 첫번째는 인도네시아, 두 번째 출장지는 필리핀이었다. 필리핀 마닐라는 마약과 도박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편견 때문에 가기 싫었으나 인력 부족으로 혼자 출장을 가야 했다. 프로젝트 출장은 프로세스와 시스템 셋업을 하러 가는 일이었다면, 운영팀 출장은 시스템이 적용된 지점들의 썩고, 고인 문제점을 해결하러 가야해서 심적으로 부담이 더 컸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를 믿지 못하고 출장 전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못하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라고 생각하면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여유로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고 출장 자체를 즐겼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연륜이 쌓인다.


출장은 3주 일정이었고, 주말마다 호텔에서 일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쉴 새 없이 이슈를 해결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2주 연기된 출장이었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3일 후 않아 물갈이를 심하게 했다. 왜 배가 아픈지 몰랐고, 배가 그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양치질도 생수병에 담긴 물로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분명 양치도 먹는 물로 했는데, ‘왜 배앓이를 하게 된 걸까?’ 했다. 그러다 일주일 후 한국 현지 직원과 점심을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더운 나라여서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의무감에 회사 정수기 물을 끊임없이 마셨는데, 정수기 안에 있는 물이 문제였다. 인도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 가면 꼭 생수병에 담긴 물을 마셔야 하고, 우유가 들어간 음료는 마시면 안 된다는 걸 간과했다.


근무했던 곳은 마닐라 변두리에 있는 열악한 창고였고, 1층 회의실 안에 있는 화장실은 지저분했고, 여기저기 쥐가 출몰하는 곳이었다. 2층의 좁은 사무실에서 거점 직원들과 함께 오밀조밀 모여서 근무했는데 에어컨이 고장 나서 직원들 모두 힘들어했고, 출장자인 내가 계속해서 지점장님께 건의했다. 결국엔 에어컨을 새로 샀는데, 직원들이 ‘출장자인 너는 별걸 다 해주네?’라고 했다. 시스템과 프로세스 운영이슈를 해결하러 간 것이었지만 직장의 복지도 신경 써 좋은 직원이 퇴사하지 않고 남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게 본사 인력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시간에 쫓기는 프로젝트를 몇 년간 경험했기에 이슈를 해결할 때도 속전속결로 끝내는 일 습관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일에 대한 신념이 몇 가지 있었는데, TAT (Turn around Time)이라고 업무처리속도를 능력치로 여겼다. 꼭 해야 하는 업무를 먼저 하지 않고 끼어드는 다른 업무를 하다가 정작 중요한 업무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업무 센스가 없다고 재단했던 혈기 왕성한 젊은 날이었다. 세월이 흐른 요즘은 회사에서의 TAT를 단축하는 일이야말로 뼈를 갈아 회사에 나를 바치는 행위가 아닐까한다. 출장지에서 나는 직원들이 회사에 뼈를 갈아 넣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필리핀 직원에게 실시간으로 ‘끝났어?’, ‘했어?’, ‘나 보여줄래?’, ‘이거는 어떻게 할 거야?’, ‘오늘 네가 할 일이 뭐지?’, ‘오늘은 여기까지 꼭 해야 해’ 하며 몰아붙였다. 착했던 필리핀 직원들은 하라는 대로 다 하긴 했지만, 매니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사 의사를 밝혔다. 매니저로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관리하는 직원들에게 이슈를 나눠주어 해결하게 끌고 가는 역량을 갖고 있지 않아 힘들어 보이는 착한 사람이었다.


필리핀에서 일어난 좀 웃긴일이 하나 있다.

내가 맡은 부서 이외에도 창고 운영이슈가 있어 말레이시아의 현지 한국인 직원이 필리핀으로 출장 왔다. 나와 동갑(남성)이기도 해서, 바로 친해졌다. 동갑이 아니더라도 아침 일찍 마닐라에 있는 호텔에서 봉고차를 타고 출근해 자정이 되어서야 같은 봉고를 타고 퇴근하면 전우애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아침 식사 중 A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대부분 호텔은 wake up call 서비스를 해 주는데, A 또한 호텔 프론트에 wake up call을 6시에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지만, 시간이 되면 객실로 전화가 와서 고객의 잠을 깨워주는 서비스이다. A는 다른 나라에서 했듯 wake up call을 부탁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A가 전날 술을 마시고 깊은 잠에 빠졌는데 자다가 왠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황당하게도 누군가가 A를 침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놀란 A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고, 몹시 화가 났다. 왜냐하면, A는 호텔에서 잘 때는 완전히 벗은 채로 잠을 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상되어 좀 웃겼지만, 웃음을 꾹 참았다. 하지만 친구뿐 아니라 호텔직원도 놀랐을 것 같긴 했다. 몹시 화가 난 A가 소리를 지르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했더니, wake up call을 했는데 전화를 안 받으면 올라가서 깨우는 것이 호텔의 프로세스라고 했다고 한다.


전 세계 호텔을 돌아다녀 봤고, 해외여행 경험 많은 나도 이건 말도 안 되는 프로세스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던 A는 호텔 메니저를 불러 엄청나게 자유로운 컴플레인을 했다. 영어를 못하면 제대로 항의할 수 없기에 통쾌하기까지 했다. A는 프로세스가 잔뜩 있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호텔 프로세스를 적은 문서를 내놓으라고 항의를 했고, 결국에는 호텔의 사과를 받았다.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방문해서 한달 넘게 출장으로만 머물렀던 필리핀이라는 여행의 장소는 나에게 휴양지보다는 전투적이었던 일터의 환경과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필리핀 호텔의 wake up call process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산타클로스 예스 윌럼슨, 덴마크와 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