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뒤죽박죽 세계여행기
미국은 나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나라였다.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미국에 인턴십으로 가려고 B1 비자 인터뷰를 봤다가 똑 떨어졌었다. 어설픈 영어로 인터뷰를 시도한 것도 문제였지만, 인터뷰어가 보기에 내가 미국에서 불법 체류를 할 것처럼 보였던 듯하다. 전공을 호텔 경영으로 바꾸려고 열망을 품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처음으로 경험한 실패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입사한 미국 회사의 교육연수를 1주일 가야 했고, 무사히 10년짜리 비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외삼촌께서는 대기업의 미국 주재원으로 가셨고, 함께 간 외숙모는 미국 생활을 진심 좋아하셨다. 경험해보지 않고, 다른 이가 환상이라고 말하는 곳은, 가고 싶은 이상이 되기도 한다. 미국에 한 번 다녀오니 나와 그다지 합이 맞는 나라는 아니었다.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대기업에서, 난임 휴직 6개월 후 복직하면서 미국 담당자가 되었다. 담당자가 되자마자 현장에 문제가 생겨 출장을 가게 되었다. 복직 전에는 아이를 두고 이제는 출장을 다니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2주만 가면 된다고 부서장이 꼬셔서 나가게 되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돌 봐주셨다. 처음 간 미국 출장지는 많은 사람이 선망하고 천국이라 말하는 샌디에고였다. 샌디에고 해변가는 아름답긴 했지만 이미 유럽에 안구가 적응된 나는 샌디에고만의 아름다움을 찾지는 못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 이민자들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대학교 때부터 시작한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집 주택담보대출까지….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자본주의국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물질 만능주의도 만연하다. 본사에서 오는 사람들의 학벌뿐 아니라 본인들끼리도 학벌, 집안 형편에 따라서 레벨을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는데 내가 샌디에고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그랬다.
출장 2주, 토, 일 모두 출근하는 빡센 일정 와중에도 얻은 건 출장자들끼리의 화이팅 넘치는 재미였다. 나 빼고는 다 MZ 세대였는데 말도 잘 통하고 모두 일도 잘했다. 출장은 역시 멤버가 좋아야 몸은 힘들어도 즐겁게 다녀올 수 있다. 2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 사우스 캘리포티아의 뉴베리 거점의 거대 문제점을 발견했다. 마지막 출장이라는 맘속 맹세를 깨고 돌아오자마자 몇 주 뒤에 2달짜리 뉴베리 출장을 갔다. 해변이 아름다운 샌디에고와는 반대로 삭막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고, 카우보이가 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뉴베리 출장 가기 전 스케일링을 받았는데, 그때 치아가 잘못되었는지 출장지에서 일주일 동안 엄청난 치통에 시달렸다. 진통제로 간신히 견딘 출장지에서 시간 쪼개 병원에 갔으나 십 오만 원 넘는 진료비에 안내받은 건 치실을 하라는 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치과를 가보니, 어금니에 금이 가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단순한 프로세스와 시스템으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슈는 출장자가 해결할 수 있었지만, 출장자가 떠나고 나면 담당 직원이 같은 문제를 또 무더기로 만들어놨다. 담당 직원은 열심히만 했지, 절대 효율이 나지 않았고 실수투성이였다. 이는 내가 퇴사할 때까지 고쳐지지 않았는데,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착했던 사람이긴 했지만, 직장에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 번째 미국 출장은 달라스였다. 한 해 3월부터 12월까지 미국에만 총 200일 이상 출장을 다녔다. 달라스 출장에서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넷플릭스만 엄청 열심히 봤다. 그때 봤던 ‘동백꽃 필 무렵’과 ‘좋아하면 울리는…’. 은 인생 드라마이다.
네 번째 출장지도 달라스였다. 19년 당시에 아이는 5살이었는데, 매번 출장을 나갈 때마다 아이와 헤어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기일 때에는 잘 몰랐는데 아이가 자기를 표현하면서부터 내 마음이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네 번째 미국권역의 대표에게 달라스 출장에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했다. 친정엄마에게는 간곡히 빌어 함께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다섯 살 아이, 친정엄마와 출장지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져가셨지만 낯선 곳에서 하는 운전은 두려운 일이었기에 엄마는 호텔에만 갇혀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우울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아이 어린이집도 문제였다. 구글 지도에서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어린이집을 선정해 몇 군데 이메일을 보냈고, 한 곳에서 답장이 왔다.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지만, 다음날부터 아이는 열이 펄펄 끓었고, 친정엄마도 함께 아프셨다. 그렇게 일주일을 앓았고, 괜찮아져서 아이를 데리고 등록한 어린이집에 갔다. 어린이집 입학비, 돌봄 비를 내고, 건강검진을 지역병원에서 받아 등록했다. 아이는 다행히도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고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이집에 다닌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추수감사절 무대에 서서 노래도 불렀다. 아들의 적응력에 감사했다. 시간이 흐른 후 미국에서 어린이집 다니는 거 좋았냐고 했더니, ‘친구들이 말을 안 해….’ 라고 했다. (동양인은 우리 아이밖에 없었다) 나름 말 안 통하는 게 힘들었던 듯하다.
네 번째 미국 출장에서는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미국권역이 샌디에고에서 달라스로 이동하면서 직원을 전부 새로 뽑아야 했고, 시스템 교육 및 고객과의 관계 등을 전부 재정립해야 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내가 지원하는 부서의 한국 직원이 본인이 맡은 일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일을 맡아서 해 주다가, 매일 TO DO LIST를 공유했는데 하나도 하지 않았고 비협조적이었다. 기억에 역량 부족이었던 듯했다. 몇 번이고 권역 대표님께 말씀드렸는데 개선되지 않았다. 얼마 후 그 한국 직원이 회사 인사에 나 때문에 힘들다고 고발했고, 이를 보고 받은 권역의 대표님은 상황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한국 직원에게 노발대발하셨다. 본사에서 도와주겠다고 나온 출장자가 현지 직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새벽 6시에 출근해 자정에 퇴근하며 현지 업무를 하는 게 정상적인 거냐며 인사직원과 한국 직원을 나무라셨다. 하지만 나는 더는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도착한 지 3주일 반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변경했다. 아이는 어린이집을 2주일도 다니지 못했지만, 친정엄마는 2달을 더 있어야 한다는 우울감에 지내시다 돌아간다는 말에 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스스로 한심했던 시간이었다. 그때가 19년 12월이었고, 그 당시 미국 전역에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걔다가 코로나 19의 어두운 기운이 전 세계에 뻗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계획으로는 20년 1월에 한국에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19년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와 좋지 않은 일이 결국에는 좋은 일이 되었다.
출장 복귀한 20년 1월 말에도 (코로나 19가 본격 시작되었던 때) 미국 댈러스 출장요청이 끊임없이 왔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계속 안 나가고 버텼다. 다행스럽게 20년 2월 초 코로나 19로 인해 회사의 모든 해외 출장이 막혔다.
한 나라에 출장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미국이었지만 내게 상처만 남긴 프로젝트기도 하다. 미국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여행의 장소는 확실히 방문하는 시기와 함께 한 사람들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만회하는 기회를 얻어보지 못한 채 코로나가 저물어가면서 휴직과 퇴사를 이어서 했다. 미국은 그러고 보니 내 인생에서 일로 열정을 쏟았던 마지막 직장에서의 마지막 출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