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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빛 Sep 24. 2020

05. 오마카세 커피 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생각하긴 어려운 것들



# 5






오마카세 (お任せ)

: '맡긴다'라는 일본어. 손님이 요리사에게 메뉴 선택을 온전히 맡기고 요리사는 가장 신선한 식재료로 제철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온전히 맡긴다'라는 문화에서 바리스타는 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우리도 항상 제철 원두를 소개하고 있는데?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오마카세 커피 바.

일본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이름을 바꾸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어가 가진 의미를 대체할만한 다른 단어를 찾지 못했고 여전히 오마카세 커피 바를 사용 중이다.


2015년.

홍대 원더플레이스 매장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여 3층에 빈브라더스가 입점했다.

정사각형의 바를 이용해 오마카세 커피 바를 진행했고, 그 당시에는 음료도 그 날 그 날 맘대로, 결제도 고객이 원하는 만큼만 지불하는 형태를 가졌었다.

많은 고객을 수용하진 못 했지만 마니아들이 생겼고 굉장히 새로운 시도를 한 사례가 되었다.




강남 한편에 자리 잡았던 오마카세 커피 바

그러다 계약이 끝나면서 강남에 있는 빈브라더스 켠에 자리 점차 파인 다이닝 형태의 메뉴를 구성하여 예약제로 운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안정하던 시간들을 거쳐 조금씩 자리를 잡을 무렵, 팀이 운영하던 시스템을 개인이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바꾸면서 내가 맡게 되었다.

처음 홍대에 생겼을 때부터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으나, 늘 그렇듯 사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진 않았고 1년이 지난 후에 기회가 찾아왔던 것.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컸고, 어떻게든 지금보다 더 나은 것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 2016년 여름.






오마카세 커피 바는 3개월을 주기로 1년에 3-4 시즌을 가져가기로 했고, 방향성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사실 모든 게 처음이라 욕심만 컸고 뭐든 더 많이 주고 많이 하는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과는 다르게 혹평도 따랐다.

나를 평가하러 온 식음료 업계의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고 많이 다쳤다.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당연히 잘할 거라 생각했고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쉽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렇게 첫 시즌을 마무리하며 눈물을 삼키는 나날이 많아졌고,

잘하기 위해 마음을 다질게 아니라, 잘하기 위해 더 공부하고 더 연구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 당시 가장 큰 오점은 내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점이었다.

나의 말투로 인해 상대에게 메뉴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했고, 내 말투에 집중하느라 내 설명은 뒷전이었던 것이다. 첫 시즌이 끝나고 제일 먼저 했던 건 톤 앤 매너 정리.


"오늘 제가 드릴-"

"오늘 제가 제공해드릴-"

"오늘 저는-"


오마카세 커피 바를 진행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서울 사람 같아져야지.

나는 서울 사람이다. 서울 토박이다. 서울 태생이다!






오마카세 커피 바.

시즌이 거듭될수록 내 스타일과 기준들이 명확해졌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었음을 깨닫고 내가 뭘 더 잘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오마카세 커피 바 실제 진행 모습

오마카세 커피 바를 통해, 커피의 다양한 변화와 콘셉트를 보여주고 싶었고,

페어링 세트와는 다르게 디저트와 잘 어울리는 커피를 제공하는 게 아닌, 커피를 디저트화 시키기 시작했다.

테이스팅 세트와는 다르게 커피가 가진 향과 맛의 노트들을 즐기는 게 아닌, 그러한 노트들을 가지고 재해석해 음료를 개발하거나 디저트화 시키는 게 나의 오마카세 커피 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생각하긴 어려운 것들을 구상하기 위해 노력했고 도전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랬던가? 나를 실패를 거듭하며 다양한 경험치를 쌓으며 조금씩 나아가려 했다.



'역시 그레이는 그레이야'라는 말을 듣기 위해 달리며 보낸 2년.

오마카세 커피 바는 내가 커피를 좋아하고, 바리스타로 일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로 자리 잡고 있었다.






새로 시스템을 리뉴얼하며 개인에서 팀으로 전환하자는 회사의 이야기.

나는 이별을 선언했다.


내가 만들어놓은 문화에 누군가가 녹아나야 하는 것. 반갑지 않았다.

누군가가 새로이 해야 한다면 그게 누가 되었던 혼자서 본인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의 의미였던 오마카세 커피 바는 그렇게 내 손을 떠났다.


2017년 겨울. 마지막 시즌을 진행하며 매 시즌마다 방문해준 분들에게 아쉬움을 전하는 그 순간순간.

처음에는 사형 선고라도 당한 것처럼 마음이 착잡하고 쓰렸다. 근데 또 우리는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이별에 익숙해져가고 있었고, 새로운 동료가 본인의 스타일을 잘 만들어가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마카세 커피 바는 다른 동료가 한 번의 시즌을 끝으로 강남 매장 리뉴얼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2019년 겨울.

몇 년 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커피 테이스팅 코스, 페어링 코스가 늘어나는 걸 체감했다.

없던 시스템들이 많이 생기는 걸 보면서 삶의 질이 달라지고 커피를 즐기는 문화가 달라짐을 느꼈고,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던 오마카세 커피 바를 다시 끄집어냈다.


2년 정도 매장을 운영하고, 팀을 케어하는데 온전히 에너지를 쏟아온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어 졌다.

내가 좋아하던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앞으로도 좋아하고 잘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할 수 있는 것.


당장 바 공간을 만들 순 없지만, 우리가 가진 공간의 구조에 변화를 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나의 추진력과 회사의 도움으로 2020년 1월. 나의 꿈은 다시 현실이 됐다.



임시로 바를 만들어 진행한 2020년 시즌 1


돌아온 오마카세 커피 바.

메뉴와 시스템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앞으로 또 풀어낼 예정이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어떤 것들을 먼저 기록해둬야 할지 모르겠고 여전히 글은 뒤죽박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흐려지기 전에 많은 것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오늘도 이렇게 흘러간 시간을 다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더 간결하게 풀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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