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을 찾아볼 수 없는 아이들이 늘어간다. 원인을 알아야 하건만 그런 분야는 내 몫이 아니다. 교사인 나는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데 최적화되어 있으면 책무를 충분히 다한 것이다. 난 무기력한 아이들의 상담가도, 인생의 멘토도, 의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수행평가지까지 백지로 제출하기에 상급학교 진학 시 평가에 치명적이라 잔소리를 하고 실태를 직시하도록 가정에 알렸다.
보호자로부터 장문의 답변을 받게 된다. 개략 요약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아이 말로는 평가지를 제출할지 몰라서 안 하고 있었다는 것(몇 번에 걸쳐 제출하라고 독촉했는데 몰랐다고?). 둘째, 예민한 아이라 다른 학생 앞에서 혼나는 것은 피해 달라는 것(집에서 눈물까지 흘렸음 고로 개별적으로 말해달라고 함). 셋째, 방과 후에 남기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
뭐라 답변을 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해서 즉답은 피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해당 학부모에게 답신을 보냈다. "가정에서 이야기하신 점을 충분히 존중합니다. 앞으로 교실에서 아이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피하고 한 발짝 물러서 있겠습니다."
해당 아이에게도 집중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대한 잔소리는 충분히 했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잘하라고 차분히 전달했다. 옷에 날개를 달았다 생각하는지 이제는 눈치도 보지 않고 수업에 전혀 참여를 안 한다. 어쩌겠나 싶어 내버려둔다.
오후에 통화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와서 연락을 했다. 학부모와 대화의 요지는 잘 지도를 해달란다.(이제 아예 책상에 엎드린 아이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수업 중 별도로 불러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이 침해되어 불가능하고 남아서 말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의미 없는 시간일 뿐 더라 남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듯싶다고 응답했다. 아이에 대한 것은 집으로 통보할 테니 가정에서 잘 지도해 달라고 공을 건넸다. 난 한 발짝 비켜서겠다고 재차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가르쳐야만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어떻게 공부시키나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한 발씩 물러선 아이들이 세명이다. 내가 어찌할 수단도 없고 각기 다른 셋을 위한 학습프로그램을 세팅할 여력도 없을뿐더러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23명에 대한 교사로서의 노력을 포기하고 매달려도 현실적으로 무의미할 뿐이다.
난 가용할 역량에 한계가 있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내 특성상 같은 노력으로 소수를 내려놓고 다수를 끌어올리는 선택을 선호한다. "모두 소중한 아이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누군가 반문한다면 되묻고 싶다. "그럼 당신에게는 묘수가 있냐고?"
부족하지만 의지가 있다면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의지가 없다면 능력여하에 관계없이 답보상태이다.
수년동안 의지가 없는 아이를 겪어오면서 그 어떤 특성보다도 변화시키기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다. 잔소리라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해서라도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보지만, 항상 결과는 매우 흡사했다.
어느 순간 무기력한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가던 손을 놓아준다. 그것이 서로가 살길임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수업도, 활동 중심 프로그램도 이런 부류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귀찮음일 뿐이다.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하는데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답답하다. 힘들고 지친다. 번아웃 상태에 가까워져 나도 좀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