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경험적 예단?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by Aheajigi


경험은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옹졸하고 얕은 나의 식견도 영향을 미치기에 선입견일 가능성도 크다. 24년이라는 시간 동안 보아온 것이 있다 보니 확신처럼 착각되는 것도 분명 있다.


아이들을 보아오다 보니 뭔가가 보이기는 한다. 아버지가 쯔쯔가무시병에 걸려 군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외사촌 누나가 걱정되어 문병을 왔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문득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넌 가르치는 꼬마 애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보여?"

"누나도 보이지 않아?"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지도했던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기질이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내 눈에 말썽을 피우는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유치원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년원을 다녀온 아이가 그랬고 고등학교를 스스로 자퇴한 아이가 그랬다.

성실함이 몸에 배에었는 녀석들이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울대를 차석으로 졸업한 녀석이 그랬고 첫 글짓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녀석이 그랬다.


아이들이 미래에 성공적인 삶을 살지 그 반대로 갈지 관뚜껑에 못이 박힐때까지 내가 볼 수는 없기에 그건 모른다. 다만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환경변화 속에서 제 몫을 할지 아닐지는 보인다.


문제는 보이는 그대로, 앞으로 일어날 예측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아이의 양육자에게 알리지는 못한다. 예측이 빗나갈 가능성도 있거니와 자칫 편애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예상이라면 더욱더 굳게 입을 다문다.


조금 더 나아진 삶을 살았으면 싶은 바람에 간혹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곤 하지만 녀석들은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남이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행여나 물리적 압박으로 개선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강압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처세술이지 근본적 달라짐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각이란 게 일어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그건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평생 자각이란 것을 못하는 이들도 보이니 이건 정말 모호하긴 하다.


기분 따라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물론 이는 이렇게 아이들 만드는 양육자들의 문제가 더 크다.

당장의 기쁨이나 유희를 행복인 양 착각하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어째야 하나 싶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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