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인연 흘려보내기
엄마의 옛 친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그 시절 고마웠던 사람이었어’ 같은 회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마운 사람인데 왜 지금은 연락을 안 해?”라고 물으니, 알 수 없는 답이 돌아옵니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아마도 제 나이가 스무 살쯤 되었을 거예요. 대학교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만 못하다며 두세 시간의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살피던 시절이라 그 묵직한 말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스물일곱,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만났다 하면 대화거리가 넘쳐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는 과거에 남겨두고, 현재 내 주위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
과거에 꽤 친했던 이가 친구에게 종종 연락하여 가까이 지내던 시절 이야기를 한다며 말입니다. 그 당시 친구가 과거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에 그렇구나, 정도의 반응을 하며 지나간 것 같습니다.
서른하나, 친구는 4월에 저는 10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사는 지역이 다른 탓에 연락으로 간간이 안부를 묻던 날이 이어지다 어느새 우리는 부모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톡을 뒤적이는데 친구 아이의 돌잔치 초대장이 프로필에 띄워져 있더라고요. 끝내 친구는 저를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한 때의 추억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습니다. 혹시 연락의 틈이 생겨 소식을 알리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톡으로 작은 돌 선물을 보냈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라는 애매한 고마움을 받았고, “축하해”라는 어색한 축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친구에게 저는 과거의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서른여덟, 휴대폰 전화번호를 바꿨습니다. 49명의 연락처만을 남겨두고, 근래까지 연락을 이어오던 지인들에게 바뀐 번호를 알렸습니다. 생일 알림이 떠도, 막 태어난 아이 사진이 올라와도 축하의 말조차 전하기 어색해진 이들은 이제 과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곧 끊어질 끈을 애써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 나니 그제야 엄마의 말도, 친구의 말도 전부 이해가 되었습니다.
"친구 관계에 작별을 고할 때를 아는 것은 계속 이어갈 때를 아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살다 보니 붙잡을 수 없는 인연이 생깁니다. 추억을 연료 삼아 주행하는 차는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어요. 그 시절 그 사람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냉정한 일이 아닌 인생에서 응당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친구는 그 사실을 저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것뿐이고요.
결혼식 사진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한 탓에 대부분 경기도민이던 친구들에게 참 고마웠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날의 사진은 저의 다짐을 도와주곤 합니다. 어쩌면 잊지 말아야 할 인연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날의 사진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부 대기실에서 친구와 찍은 사진은 그 시절 우리를 기억하게 될 마지막 사진이 되었으니까요.
물론 노력해서 이어가야 하는 인연과 헷갈리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나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가령, 오랜만에 만나도 시간의 틈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삶을 가졌다 해도 마음을 다해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사람,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의 연락처에 제가 사라진 이유는 그들을 잊기 위함이 아님을 부디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손 틈에 걸려있는 이들을 억지로 쥐지 않고 흘려보낸 거라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들의 손 틈에 내가 아직 걸려있다면 꼭 쥐어 놓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순되고 이기적인 마음 또한 이해받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