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와 이집트 미술을 보면서)
어떤 매체를 볼 때 그 매체의 시작점을 돌아보는 것은 재미있는 접근입니다.
어떤 의도와 방향성을 가지고 시작되었는지를 볼 수 있거든요.
영화에 관한 책을 보면 영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물론 엄밀하게는 최초의 상업 영화가 아니라고 하고,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관점에서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을 최초의 영화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열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죠.
https://www.youtube.com/watch?v=1dgLEDdFddk
여담입니다만, 작년 초에 이 영상을 업스케링하고 다듬어서 4K 60fps로 만든 영상을 보니 굉장히 신기하더라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3RYNThid23g
이 영화를 보면서 기차가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줄 알고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쳤다는 이야기 역시 널리 퍼져있습니다.
문명 5의 오프닝 영상의 50초 정도부터 이 이야기를 재현한 듯한 부분이 있는 것을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VuNhNHxbD4
물론 이 이야기조차 사실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열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라는 위치를 가지게 된 데에 어느 정도 일조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일단 '열차의 도착'을 최초의 영화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단지 열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기록해놓았을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실의 기록'이라는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필름에서 현재의 디지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빛을 저장한다는 면에서
영상은 재현적인 속성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죠.
한 편으로 이 영화를 보고 놀랐다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어떤 감정적인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죠.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만한 점이 있는데요.
실질적으로 내러티브를 가지고 편집이라는 기법을 동원해서 영화를 만든
조르주 멜리에스의 원래 직업이 마술사였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 중에 달 세계 여행과 같은 SF 판타지도 있었죠.
https://www.youtube.com/watch?v=ZNAHcMMOHE8
이 점을 돌이켜보면 영화는 시작부터 다큐와 같은 재현적인 성격과
사람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유희적인 성격을 둘 다 가지고 시작한 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영상 시장을 봐도 이 흐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이처럼 어떤 매체를 공부할 때 그 매체의 시작 지점을 돌아보는 것은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방식인데요.
인류가 만든 미술의 시작 지점을 돌아보면서 제가 생각해 본 부분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미술사 책에서도 이 두 시기들을 미술 초기의 중요한 지점으로 잡고 있다 보니
선사시대 미술과 이집트 미술을 보면서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고 하는데요.
선사 시대 미술로 미술시간에 한 번 즈음 들어봤을 라스코 동굴벽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그 이전에 그려진 그림도 발견되고 있긴 합니다만,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익숙한 그림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떤 그림이 인류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인가라는 점은 고고학적으로는 중요한 이야기겠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지도가 높은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보시는 분들에게 더 와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담으로 최근에 인도네시아 쪽에서 동굴벽화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글을 수정하고 있는 시점에서 3일 전 정도에
무려 4만 5천여 년 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 벽화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78694.html
사설이 길었네요. 다시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좌측이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들소, 오른쪽이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말입니다.
이 그림들을 보면 의외로 꽤나 사실적으로 그려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당하는 동물들이 각각 개성이 드러나도록 그려져있죠.
동굴에서 직접 보면서 그릴 수는 없었을 텐데 정말 엄청난 관찰력과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아마도 뛰어난 사냥꾼이었을 겁니다.
사냥의 대상이 되는 물체에 대해서 엄청나게 집중하면서 기회를 노렸겠죠.
이런 경험들이 엄청난 기억력으로 돌아와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그림이 아직 그림의 화법이나 그리는 재료 등이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선사시대의 그림이라는 것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죠.
앞서 열차의 도착이 재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던 것처럼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역시 마치 이 동물들이 눈앞에 있는 듯한 효과를 불러왔을 겁니다.
이런 그림이 사냥이 잘 되길 바라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그려졌다고 하는데요.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불이 아른아른하는 상황에서 저 그림을 본다면
일렁일렁하는 불꽃의 그림자 때문에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최초의 영화관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이렇게 소위 리얼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던진 창이 그대로 사냥의 연습이 되었고,
나중에 사냥의 성공으로도 이어졌을 겁니다.
영상 역시 이런 역할을 여전히 수행합니다.
요즘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영상으로 만든 제품 매뉴얼이나 리뷰 영상은 간접 경험을 하게 해주죠.
이런 간접 경험을 하면서 몰입하게 해주는데 중요한 점은
얼마나 이것이 사실적으로 보일 것인가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실제감을 높이기 위한 방향에 따른 기술의 발전 방향이
높은 해상도, 높은 다이내믹 레인지, 넓은 색공간 등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반면 이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이집트의 그림을 보면 오히려 앞선 선사시대의 미술보다
사실감이 더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대 이집트 그림에 나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머리는 측면인데 눈은 정면입니다. 몸은 정면이고 그 와중에 배꼽은 돌아가있죠.
몸이 정면인데 다리는 또 측면입니다. 실제로 저 자세를 취해보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그리는 능력이 모자란 것이라고 보기에 같이 그린 새의 모습은 너무나도 정교합니다.
조류학자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종류의 새 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하죠.
그럼 사람을 이렇게 그린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앞서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능력은 몰입감에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관념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류가 겪은 인지 혁명에 의해서 얻게 된 관념들이
이런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모두가 다른 개별 사물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서 개념화할 수 있는 능력,
그런 개념을 바탕으로 어떤 형식을 만드는 능력. 이런 능력은 다른 동물들에서 찾기 힘든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형식 속에서 사람은 더욱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죠.
고대 이집트의 사람을 그리는 방식은 실제보다 형식이 우선했기 때문에 나온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 마땅히 그려야 하는 사람을 그린 것이죠.
이런 그림이 그려진 밑바탕에는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시했던 그들의 세계관이 깔려있습니다.
시체가 썩지 않게 미라를 만들고, 왕의 피라미드를 거대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죠.
이런 형식적인 면이 발전하게 되면 소위 자신들이 세워놓은 본질에 몰두하게 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것이 규칙이 되고 이런 규칙은 점점 강화되죠.
사람 얼굴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측면,
눈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정면,
두 팔이 온전히 있음을 보여주는 몸통의 정면 등등
이런 규칙이 강화되다 보면 나중에는 이런 규칙이 생긴 이유도 잊어버리고
규칙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많이 생겨왔고, 영상 작업을 하는 데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형식에 집중하는 것이 늘 나쁜 결론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잘 구성된 형식은 효율적으로 생산성을 높여주죠.
영상 작업에서 잘 꾸려진 워크플로우는 많은 경우 좋은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제가 받는 질문 중에 상당 부분이 이런 형식적인 부분에 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형식적인 부분의 중요함도 많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이는 대로 그린 선사시대의 그림, 형식화가 진행되어 보이기보다 생각한 대로 그린 그림.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두 가지 흐름은 미술사와 영상을 묶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식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은 충실한 재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죠.
이런 방식은 그리스,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미술 전까지 이어집니다.
생각한 것을 그리는 그림은 재현보다는 무엇인가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
여기서는 표현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겠습니다. 이런 표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이런 방식은 이집트, 중세를 거쳐 현대 미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술사를 구분하는 수많은 방식이 있고, 제가 말하는 이런 구분이 미술사적으로 정확하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영상작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느 한쪽만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드뭅니다. 어느 한 쪽의 영향이 좀 더 클 뿐이죠.
특히나 표현을 위한 방식은 세부적으로 나눠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아주 많아
이 부분도 나중에 조금씩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번 글에서는 크게 두 방향성만 이야기해보죠.
저처럼 촬영과 색보정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두 가지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표적으로 색온도의 개념을 예로 들어볼 수 있는데요.
색온도는 하루 중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색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함. 한낮의 따뜻함, 해 질 녘의 붉은 노을 등을 표현할 수 있죠.
이를 통해 시간의 변화 등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틀어진 색온도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무엇인가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겠죠.
한낮이지만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색온도를 3200에 맞춰서 차갑게 표현할 수도 있고,
아니면 화이트 밸런스를 잘 맞춰와서 후반 작업에서 원하는 느낌을 낼 수 있도록 보정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메타 데이터가 확보된 촬영본이어야하겠죠.)
조금 더 좁혀서 색보정 작업에 있어서도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충실한 재현을 위해서 이미지를 균형감 있게 보정하고, 여러 컷 사이의 연속성을 만드는 Color Correction 과정과 연출의 의도에 맞게 특정한 느낌을 부여하는 Look Making 과정 역시 색보정의 중요한 두 축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tQX1rvsqbvU
앞서 말한 것처럼 영상은 사진에서 시작된 것처럼 근본적으로 재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매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미술에서 재현을 위해서 해온 수많은 노력들을 먼저 공부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재현을 위한 노력을 위해서 르네상스 시대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노력한 부분을
공부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들이 했던 수많은 접근 방식은 지금도 되돌아봄직하죠.
생각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해온 고민들은 좀 더 광범위한 생각을 해보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질서를 만들기 위한 방향과 질서보다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한 방향,
그 외에 역사적으로 행해진 다양한 시도들을 보면서 영감을 얻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같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고 보니 인류가 가장 먼저 했던 시각적인 매체의 접근 방식과
현재 영상이라는 시각적인 매체 사이에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 보면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이런 시작 지점을 잡고 이야기를 끌어가야
앞으로 쓸 블로그의 내용이 번잡스럽지 않을까 해서 먼저 이런 글을 써봤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별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
소위 '잘 그렸다!'라는 표현을 가지고 한 번 이야기를 해보고 마무리해보려고 합니다.
선사시대에서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르네상스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잘 그렸다는 표현을 합니다.
반면, 현대 미술을 보면서 잘 그렸다는 표현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하면 어색하니 작품을 놓고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두 작품 모두 걸작이라고 불리는 그림입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와 빌렘 드 쿠닝의 '여인 5'이죠.
시스티나의 성모를 보면서 우리는 잘 그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장 밑에 있는 천사를 본떠서 엔제리너스 로고가 만들어졌다고 하죠.)
하지만, 빌렘 드 쿠닝의 여인을 보고 잘 그렸다는 표현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잘 그렸다기보단 충격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죠.
여기서 '잘 그렸다'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르네상스의 그림을 보면서 진짜처럼 그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을 보면서 진짜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잘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잘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1번과 2번은 가치적인 판단이 들어가 있어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3번의 의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잘한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익숙하고 능란하게 하다.'
어디서 자주 본 것 같을 때, 무언가를 해내는 과정에서 막힘이 없을 때 우리는 잘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익숙하고 능란하게 만들어진 그림만이 잘 그린 그림일까요?
우리는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을 알고 있습니다. 뭔가 삐뚤빼뚤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아직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익숙하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 선을 똑바로 긋기가 어렵고, 원하는 도형을 그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술의 부족이라고 하기에 아이들의 그림에는 어떤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가족을 그렸을 때 사람이 어떤 대상보다 클 때가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크기의 차이가 다릅니다.
이걸 조금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비율이 맞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율만 다를까요? 사람의 머리카락 색과 피부 색은 제각기 다 다릅니다.
황인종이라고 하더라도 좀 더 까만 사람이 있고 좀 더 하얀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엄마보다 아빠가 좀 더 까만 편일 겁니다.
하지만, 아이의 그림에서는 모두 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이들의 눈에는 같아 보이는 것일까요?
자세 역시 마찬가지죠. 아이들 그림에서는 많은 경우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정면으로 그려집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을 담는다면 훨씬 다양한 자세를 담는 것이 일반적일 겁니다.
이 부분에서는 아이들의 그림과 고대 이집트의 그림이 비슷하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그림은 사실적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정확할 때도 있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평소에 짓는 표정, 집안의 분위기 등을 놀랄 정도로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그리는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드러내는 것
어찌 보면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현대 미술의 근본이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마다 너무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고, 그런 생각이 자유롭게 표현되다 보니
자칫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죠.
이왕 생각한 대로 그린 그림을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들어가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분류하여 정리한다 - 개념화, 형식화
2. 자유롭게 상상한다 - 추상화,
2번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 미술에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라면
1번은 이집트 미술에서 보게 되었던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혹은 개념) 그 자체입니다.
생각을 제외한 나머지는 최대한 단순하게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둘 수 있습니다.
이걸 더 발전시킨다면,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표준을 정하는 과정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 중에 형식이 강화되고,
때로는 이런 형식 때문에 생각이 형식에 종속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형식이 강화되는 이유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본래 단순함을 추구했던 이유는 핵심을 남기고 나머지는 줄이고 싶기 때문인데
여기서 쉽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작동합니다.
이왕 단순하게 하는 거 좀 더 쉬운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 생기는 것이죠.
이렇게 본래의 핵심을 찾는 방향에서 쉽게 작업하는 방향으로 방향성이 틀어지다 보면
그것이 가장 큰 목적이 되고, 이 와중에 형식만을 강요하는 역행이 일어납니다.
어떤 물건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이런 쉬운 방식이 많은 물건을 만드는 게 기여하는 핵심이 되지만,
무형의 것을 만드는 예술 같은 분야에서는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 때문에 이집트의 미술가는 예술가이기보다 일종의 기능공이 되어버렸죠.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과 생각한 대로 그리는 것
이 두 가지는 미술사를 나누는 큰 화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느 정도 이 두 경향은 교차해서 나타납니다.
한 쪽이 강해지는 시기가 지나면 다른 쪽이 강해지는 시기가 오기도 하죠.
보이는 대로와 생각한 대로는 우월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능숙함이 둘 다 높다고 했을 때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은 보여지는 대상에 따라 아름답거나 추하게 보일 겁니다.
반면 생각한 대로 그릴 때 아름답게 이상적으로 그릴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추하게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 추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의미가 있는 일이겠죠.
물론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그리는 것 둘 다 부정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이미지의 배반'입니다.
담배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쓰여있습니다.
재현은 단지 재현일 뿐 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미지가 가지는 재현성에 의문을 던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죠.
재현적인 성격을 띤 그림으로 재현성에 의문을 던지는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기존에 생각하던 부분을 다시 한번 뒤집어 보는 방식 역시 충분히 멋진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앞서 이야기한 재현을 위한 목적과 표현을 위한 목적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두 가지 관점을 가진 많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죠.
쭈욱 쓰다 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글이 쓰인 것 같네요.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나름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영상과 미술 이야기들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