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의뢰인과 함께하는 안영진 변호사입니다. 수십 년 바다와 함께한 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의 곁을 떠난 그에게, 믿었던 보험사는 ‘자필 서명’이라는 차가운 벽을 내세웠습니다. 거대 보험사를 상대로 한, 정보 비대칭의 절망적인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남해안에서 평생을 어선 선장 겸 선주로 살아온 F씨. 그는 험한 바다를 집 삼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러던 몇 해 전, 칠흑 같은 밤바다 위에서 다른 선박과 충돌한 F씨의 배는 속수무책으로 전복되었습니다. 길고 긴 수색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차가운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유족들은 수십 년 전 F씨가 만약을 대비해 가입했던 생명보험을 떠올렸습니다. 약 2억 원의 보험금은 남은 가족에게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보험사에서 날아온 한 장의 통보서로 산산조각 났습니다.
‘어부·선원 등이 직무상 선박에 탑승 중 발생한 손해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약관 조항이었습니다. 보험사는 F씨가 직접 남긴 ‘자필 서명’을 절대적인 증거로 내밀었습니다. 스스로 이 불리한 조항에 동의했으니 책임이 없다는 논리. 유족들에게 F씨의 서명은 더 이상 가족을 지키려던 따뜻한 약속이 아니라, 모든 희망을 가둬버린 차가운 족쇄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보험사 앞에서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들이 가장 강력한 방패로 삼은 ‘자필 서명’은 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의뢰인을 압박하는 가장 무거운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험사 자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그들의 내부 시스템과 소송 전략을 속속들이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완벽하다고 믿는 지점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 약점의 이름은 바로 ‘설명의무 위반’이었습니다. 보험 계약은 약관이 미리 정해진 ‘부합계약’이기에, 법은 정보 약자인 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험사에 매우 엄격한 설명의무를 지웁니다. 특히 고객에게 불리한 면책 조항 같은 핵심 내용은 반드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여 이해시켜야 합니다.
만약 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설령 계약서에 서명을 했더라도 해당 조항은 계약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법의 원칙을 다윗의 돌멩이 삼아, 골리앗의 이마, 즉 ‘자필 서명’의 정당성을 정조준하기로 했습니다.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F씨가 설명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사가 설명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보험사 스스로 증명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송의 구도를 바꾸는 ‘입증책임’ 법리의 힘입니다. 저는 곧바로 보험사가 증거로 제출한 F씨의 ‘상품설명서 수령 및 교부 확인서’를 확보해 정밀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설명의무 이행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 즉 ‘상품설명서를 교부받고 설명을 충분히 들었음을 확인합니다’라는 문구와 날짜가 F씨의 자필이 아니거나 아예 공란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는 보험설계사가 형식적인 절차로 서명을 받고, 가장 중요한 확인 절차를 누락했음을 보여주는 ‘스모킹 건’이었습니다.
보험사가 보통 입증책임을 방어하기 위해 제시하는 해피콜 녹취나 상품 설명 녹취 같은 객관적 자료 또한 전무했습니다. 저는 이 불완전한 서류 한 장만으로는 입증책임이라는 무거운 저울을 결코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점을 재판부에 강력히 피력했습니다. 슬픔에 잠긴 유족에게 ‘듣지 못했음을 증명하라’는 가혹한 요구 대신, ‘완벽하게 설명했음을 증명하라’는 법의 압박을 보험사에게 되돌려준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법정 다툼은 단순히 서류의 흠결만을 따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저는 재판부의 마음을 움직일 또 하나의 강력한 논리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상식과 합리에 기반한 ‘계약 체결 동기’였습니다. “평생을 바다 위에서 살아왔고, 거친 조업으로 어깨 수술까지 받았던 F씨가, 정작 자신의 본질적인 직업 활동 중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 전혀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이 보험에 가입했을까요?”
이 상식적인 질문은 법정에서 ‘계약자의 합리적 기대에 반하는 계약’이라는 법률 논리로 구체화되었습니다. F씨의 삶과 직업적 배경을 깊이 있게 설명하며, 이 계약이 그의 삶과 완전히 모순된다는 점을 부각했습니다. 또한 보험설계사에 대한 증인신문을 통해, 실적 압박 속에서 수많은 약관 조항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영업 현장의 현실을 드러내며, F씨가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재판부가 간접적으로 체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법원은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재판부는 보험사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F씨에게 치명적인 면책 조항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인정하기에 명백히 부족하다고 판시했습니다. 형식적으로 작성된 확인서는 설명의무 이행의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무엇보다 F씨가 해당 내용을 알았다면 계약을 체결할 동기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저희의 주장을 전부 수용했습니다.
거대 보험사의 논리는 상식과 합리라는 더 큰 원칙 앞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이 판결로 유족들은 그토록 바라던 보험금 2억 원 전액을 지급받고, 가족을 지키려던 F씨의 마지막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자필 서명이라는 명백해 보이는 증거 속에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절차적 하자와 논리적 모순을 찾아낼 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고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벽에도 전문가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문이 숨어있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