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의뢰인과 함께하는 안영진 변호사입니다.
국경 간 전자상거래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소비자의 선택권은 크게 확대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제품 안전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법적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특히 샤오미 선풍기 폭발과 같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다수의 국내 판매업체들은 '단순 구매대행'이라는 사업 모델을 방패 삼아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판매 과정에서 보인 구체적인 행위들이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국내 판매 주체'라는 신뢰를 형성했다면, 우리 법원은 제조물책임법을 근거로 그 책임을 엄중히 물을 수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구매대행업체에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한 핵심적인 법적 근거와 구체적인 소송 전략을 심도 있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1. 핵심 법적 근거: 제조물책임법 제2조 제3호 나목 ('오인 표시' 책임)
제조물책임법의 입법 취지는 복잡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정보 비대칭에 놓인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하고, 제조업체의 과실 입증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소비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 법은 책임의 주체인 '제조업자'를 다음과 같이 이중적으로 폭넓게 정의합니다.
가목. 실질적 제조업자: 제품의 제조·가공 또는 '수입'을 업으로 하는 자
나목. 표시 제조업자: 스스로를 제조업자로 표시하거나, 제조업자로 오인(誤認)하게 할 수 있는 표시를 한 자
해외직구 사고와 관련된 소송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나목'의 '오인 표시' 책임입니다. 이는 사업자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스스로 형성한 '신뢰성 있는 외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뢰책임' 및 '외관주의' 법리에 근거합니다. 즉, 소비자가 판매자의 외관을 신뢰하고 거래에 이르렀다면, 법은 그 신뢰를 보호하며 판매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2. 구매대행업체의 주요 항변 논리와 그에 대한 반박
가. 주요 항변: "우리는 '수입업자'가 아니다."
구매대행업체들은 과거 전동킥보드 화재 사건 판례(서울중앙지방법원 2017가단5026235)를 근거로, 자신들은 관세법상 납세의무자가 최종 소비자인 단순 중개업체일 뿐 제조물책임법상 '수입업자'(가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해당 판례에서 법원은 실제로 사업자등록 형태, 통관 방식 등을 고려하여 '수입업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나. 반박 논리: "쟁점은 '수입업자' 여부가 아닌 '오인 표시' 여부다."
이러한 항변은 법리적으로 쟁점을 벗어난 것입니다. 위 판례는 원고가 '수입업자 책임(가목)'만을 주장한 사안에 대한 판단일 뿐, '판매자로 오인하게 만들었는지(나목)'에 대한 법적 쟁점은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당 판례를 근거로 '오인 표시'에 따른 책임까지 면제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법 조항을 동일시하는 논리적 오류이며 법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소송의 핵심은 관세법상 지위가 아니라, 상거래상 소비자를 어떻게 오인시켰는가에 있습니다.
3. '오인 표시'를 입증하는 구체적 행위 유형 및 법적 의미
소송의 성패는 구매대행업체의 행위가 '단순 중개'의 범위를 넘어섰음을 객관적 증거로 입증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다음 행위들이 누적될수록 책임 인정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물리적 외관의 형성: 자사 로고 박스 재포장 및 스티커 부착: 이는 제품의 국적과 원래 제조사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자사를 제품의 출처 및 책임 주체로 각인시키는 결정적 행위입니다. 소비자는 외관상 국내 유통 제품과 아무런 차이를 인지할 수 없게 됩니다. 한글 설명서·보증서 동봉: 자체적으로 번역·제작한 한글 설명서나 보증서를 제공하는 것은 단순 전달을 넘어, 제품의 정보 제공 및 품질 보증에 대한 의무를 자처하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독자적 서비스 및 지원 보증: '자체 A/S 보장' 및 '국내 수리 협력업체 운영' 명시: 이는 단순 중개업체라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이러한 보증은 소비자로 하여금 '문제가 생겨도 이 한국 회사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강력한 신뢰를 형성하며, 사실상 공식 수입·유통업체와 동일한 외관을 창출합니다.
판매 주체로 오인시키는 마케팅 및 판매 방식: '공식몰', '국내 단독 론칭', '총판' 등 배타적 지위 암시: 이러한 용어는 소비자로 하여금 해당 업체가 제조사로부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공식 파트너라고 믿게 만듭니다. 단일 가격(원화) 표시: 제품가, 해외 배송비, 관세, 수수료 등을 구분하지 않고 최종 가격을 원화로만 표시하는 방식은 소비자가 거래의 본질을 '대행 위임'이 아닌 '국내 쇼핑몰에서의 매매'로 인식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입니다.
4. 주장을 강화하는 정책적·법리적 보강 논리
소비자 보호 공백 해소라는 정책적 당위성: 국내 소비자가 언어, 비용, 관할 문제 등을 극복하고 해외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더라도, 해당 판결을 외국에서 집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실상 유일하게 실효적인 구제 수단이 외관을 창출한 국내 사업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임을 강조하며, 법원이 시대 변화에 맞춰 법 해석을 통해 실질적인 소비자 보호에 나서야 함을 강력히 피력해야 합니다.
'외관주의' 법리 유추 적용: 우리 상법상 회사가 실제 대표이사가 아닌 사람에게 대표이사라는 명칭 사용을 허용한 경우, 이를 믿고 거래한 제3자를 보호하는 '표현대표이사' 제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뢰보호의 원칙(외관주의)을 유추 적용하여, 스스로 책임 주체의 외관을 만들어 영업상 이익을 얻은 구매대행업자 역시 그 외관을 신뢰한 소비자에게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5. 승소를 위한 구체적인 소송 준비사항
철저하고 신속한 증거 확보: 웹사이트 정보는 언제든 수정·삭제될 수 있습니다. 구매 시점의 제품 상세 페이지, 결제 과정, A/S 정책, 이용약관, FAQ 등 모든 관련 웹페이지를 URL과 접속 시간이 보이도록 전체 화면으로 캡처해야 합니다. 또한, 수령 당시의 포장 박스, 부착된 스티커, 동봉된 서류 등 모든 물적 증거를 사진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정확한 소장 작성 전략: 소송의 첫 단추인 소장에서부터 청구원인의 핵심을 '오인 표시'(나목) 책임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피고가 '수입업자'가 아니라는 항변으로 쟁점을 흐리려는 시도를 초기에 차단하고, 재판의 초점을 피고의 상행위 자체에 맞추어야 합니다. '수입업자'(가목) 책임은 예비적 청구원인으로 추가할 수 있습니다.
손해의 구체적 산정 및 입증: 폭발한 제품의 가액은 물론, 화재로 인한 주변 기물 파손 등 재산상 손해, 화상 등 신체 상해로 인한 치료비 및 일실수익, 그리고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까지 손해액을 구체적으로 산정하여 청구해야 합니다.
결론
구매대행업체라는 상호는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만능 방패'가 될 수 없습니다. 판매 과정에서 소비자를 '실질적 판매자'로 오인하게 한 명백한 행위들이 입증된다면,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정교한 법리 구성과 철저한 증거 수집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승소 가능한 정당한 권리 주장입니다. 유사한 피해로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관련 분쟁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와 상담하여 최적의 전략을 수립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