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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칼럼, 배임죄는 왜 폐지 수술대에 올랐나

by 안영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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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의뢰인과 함께하는 안영진 변호사입니다. 혹시 당신은 조직에서 어떤 형태로든 의사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나요?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배임죄 폐지’ 논란,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진짜 이유를 파헤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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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배임죄’ 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 해묵은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진행되는 이 논의는 크게 세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 형법에서 조항 자체를 들어내는 ‘전면 폐지’라는 가장 과감한 선택지, 합리적 경영 판단에 면죄부를 주는 ‘경영판단원칙의 명문화’, 그리고 구성 요건을 명확히 다듬은 ‘대체 입법 마련’이 그것입니다.


이 논의의 불씨를 당긴 것은 바로 최근 개정된 상법입니다. 기존에 이사의 충실 의무가 ‘회사’에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그 대상이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작은 변화가 경영진에게는 거대한 파도로 다가왔습니다. 언제든 주주로부터 배임죄로 고소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죠. 결국 배임죄 개정 논의는 이러한 경영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보완책으로 본격화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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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아닌 ‘결정’을 처벌하는 법, 횡령과 배임의 결정적 차이


많은 분이 횡령과 배임을 혼동하지만, 특히 경영인에게 배임죄가 훨씬 위협적인 이유는 그 본질적 구조에 있습니다. 횡령이 회사의 돈이나 자산 같은 ‘특정 재물’을 훔치는 비교적 명확한 범죄라면, 배임은 ‘재산상의 이익’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을 다룹니다. 신뢰를 저버리고 불합리한 의사결정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가 그 대상이 될 수 있죠.


무엇보다 배임죄가 치명적인 이유는, 대법원이 이를 ‘위태범(危殆犯)’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회사에 실제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손해를 유발할 ‘위험’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회사의 명운을 걸고 신기술 R&D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만약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검찰은 “성공 확률도 낮은 사업에 무리하게 투자한 결정 자체가 배임”이라며 칼을 겨눌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혁신가, 실패하면 범죄자가 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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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족쇄인가, 최후의 보루인가


배임죄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리는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폐지를 찬성하는 측은 배임죄가 기업 활동의 족쇄라고 주장합니다.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처럼 법 조문 자체가 지나치게 모호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남용될 소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본래 민사소송으로 풀어야 할 경영 분쟁까지 형사처벌의 잣대를 들이대고, 해외 선진국에는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규제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실제로 횡령·배임죄의 1심 무죄율이 전체 형사사건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는 사실

은 무리한 기소가 많았음을 시사합니다.


반면 폐지를 반대하는 측은 배임죄가 기업 범죄를 막을 최후의 보루라고 말합니다. 대주주가 회삿돈을 빼돌리거나(터널링), 계열사에 부당하게 일감을 몰아주는 등 기업 비리를 막는 핵심 장치라는 것이죠. 만약 배임죄가 사라진다면, 부도덕한 경영진의 전횡으로부터 소액주주와 회사를 보호할 방법이 사라져 기업 지배구조가 후퇴할 것이라 우려합니다. 일각에서는 특정 정치인의 사법 리스크를 덜어주기 위한 ‘방탄용 입법’이 아니냐는

날 선 비판도 제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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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대기업 총수에게만 해당하는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배임죄의 불확실성은 혁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리더의 목에 걸린 칼과 같습니다.


스타트업 창업가가 투자금으로 과감하게 사업 모델을 전환(피봇)했다가 실패했다면?


M&A 팀장이 주도한 기업 인수가 기대 이하의 실적으로 손실을 낳았다면?


신사업 개발 부장이 야심 차게 내놓은 신제품이 시장에서 외면받았다면?


이 모든 도전의 결과는 배임죄 기소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기소되는 것만으로도 기업의 신뢰도는 추락하고, 개인은 유죄가 아니더라도 수사 기록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봅니다.


이러한 현실은 결국 조직에 ‘경영의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를 가져옵니다. 누구도 과감한 도전을 하려 하지 않고, 실패 시 책임을 회피할 명분(CYA: Cover Your Ass)을 만드는 데만 급급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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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


법이 어떻게 바뀌든, 경영을 둘러싼 법적 불확실성은 한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문제가 터진 뒤에야 변호사를 찾는 것은 이미 늦습니다. 변화의 시대, 리더에게는 선제적이고 예방적인 법률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첫째, 방어 가능한 의사결정 기록을 구축하십시오. 모든 주요 결정의 배경과 합리성을 입증할 자료(시장 분석, 전문가 자문, 회의록 등)를 체계적으로 남겨야 합니다. 훗날 법정에서 ‘경영판단원칙’을 주장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둘째, 기업의 지배구조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십시오. 이사회 운영 규정이나 내부 통제 시스템의 허점을 미리 찾아내 형사 리스크의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셋째, 중대한 거래는 초기 단계부터 전문가의 자문을 받으십시오. M&A나 대규모 투자처럼 리스크가 큰 사안일수록, 법률 전문가와 함께 법적 방어막을 꼼꼼히 설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격변의 시기, 당신의 신념과 회사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투자는 바로 이러한 ‘사전 준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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