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치

by 가원

아람치


땅속 깊이 자리한 어느 역을 향한 출발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도훈 기관사가 쓴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를 만났죠. 이 책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생생히 되살려내며,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가끔은 가슴 깊이 따스함과 감동을 스며들게 합니다.

특히, 표지 그림 속 '비 오는 날의 지하철과 쟈철에페'는 저에게 깊은 성찰의 순간을 선사했습니다.

제 주변에는 코레일로 전환된 뒤 교통공사 기관사로 전직한 지인이 몇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 오는 날을 극도로 싫어했죠. 빗물에 젖은 쇠바퀴가 미끄러지는 탓에 기차를 정위치에 멈추게 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고된지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비 오는 날이면 승강장에 나타나는 '펜싱 선수들'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을 '쟈철에페'라는 기상천외한 작명을 했습니다. 지하철 펜싱 선수들은 닫혀가는 출입문에 우산을 찔러 넣으며 분투하고, 기관사들은 정시 운행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들과 치열한 방어전을 펼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 역시 공감과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급하면 그렇게 우산을 찔러 넣을까 이해도 갔고, 문 앞에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직장 근무지가 멀었던 탓에, 새벽같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동차 문이 닫히는 순간을 두세 계단씩 뛰어내리며 눈앞에서 지켜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5분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고 야속했는지요.

매일 수천 번 문을 여닫으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기관사들은 긴장의 끈을 놓을 틈이 없었습니다. 작가도 처음에는 그저 운 나쁘게 독특한 승객들을 만난 거로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세상에는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독특한 승객들만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들의 긴장과 책임감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지하철을 타다 보면, 나처럼 '실버 패스'를 쥐고 개찰구를 통과하며 자동 안내음 “사랑합니다.”를 듣는 어르신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은 '교통약자석'으로 향하죠. 이 좌석은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등을 위한 자리로, 필요할 때 이들에게 양보하도록 권장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중교통의 교통약자석은 마치 '노인 지정석'처럼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들이 이 자리를 이용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편히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사회가 마땅히 지켜야 할 존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벌어지는 무질서와 몰염치는 쉽게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두 자리를 차지하는 '쩍벌',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오는 무리한 행동, 울리는 전화 목소리까지. 이런 모습을 보며 "배려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한 어르신이 일시적 교통약자였던 젊은 여성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빼앗으려는 모습을 보고는 차마 분노를 억누르기 어려웠습니다.


책을 덮으며, 지하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응축된 작은 세상이었고, 모두가 제 몫을 다한다면, 멈춘 기차도 다시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아람치'로 나부터 명품 승객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노약자석이 '노(怒)할 좌석'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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