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침묵은 나를, 그리고 이 관계를 보호하고 있을까
남자 친구가 잠수를 탔어요.
본인은 '회피형'이라 어쩔 수 없대요.
갈등이 생기면 뒤로 물러나 입을 닫고, 감정이 격해질수록 오히려 침묵을 선택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언젠가부터 ‘회피형’이라고 부른다.
‘회피형’이라는 말은 원래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 이론에서는 유아가 양육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친밀한 관계 패턴으로 이어진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크게 몇 가지 애착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중 회피형 애착은 가까워질수록 불편함을 느끼고, 의존이나 감정 표현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건, 모든 침묵을 곧바로 '회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잠시 말을 멈추는 사람과, 관계 전체를 닫아버리는 사람은 다르다.
감정이 감당되지 않아 물러나는 것과, 침묵을 통해 상대를 불안정한 상태에 두는 것은 같은 행동처럼 보여도 다른 역할을 한다. 애착이론이 말하는 회피적 애착은 가까워질수록 불편함을 느끼는 관계의 경향에 가깝다.
반면, 침묵이 반복될수록 상대가 점점 무력해지고 설명할 기회조차 사라진다면, 그건 애착의 문제라기보다
관계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는 회피형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감정이 압도되었음을 전달하기보다는 소통을 닫아버리는 힘이 실려있다. 이 말이 이런 식으로 등장하면,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사라진다. 왜 말을 멈췄으면, 이 침묵이 누구를 보호하고 있으며, 이 관계 안에서 누가 점점 혼자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을 수 없게 된다.
누군가가 당신 앞에서 침묵할 때 당신은 어떤 상태가 되는가?
- 기다릴 수 있었는가?
- 마음이 쪼그라들었는가?
- 말을 걸어도 될지 몰라 자꾸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었는가?
침묵 자체는 힘들지 않다. 그 침묵 앞에서 내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 이게 내가 참아야 할 문제인지
- 내가 도망쳐야 할 상황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침묵 앞에서 사람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불안할 수는 있지만 관계 전체가 사라질 것 같은 공포까지는 가지 않는다. 연결이 잠시 멈춰 있다는 느낌이지, 내가 관계에서 제거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침묵 앞에서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생각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마치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설명 없는 침묵, 반복되는 차단은 사람을 끊임없이 자기 점검 상태에 머물게 한다.
내가 뭘 놓쳤나? 내가 더 이해심이 부족한가? 내가 예민한가? 이런 자기 검열이 반복되면 무력감에 휩싸인다. 그러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말이다.
힘을 휘두르는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낳는다.
침묵을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침묵이 회피는 아니고, 모든 회피가 방어는 아니다.
방어로서의 침묵은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한 멈춤이다. 말이 없을 수는 있어도, 관계를 인질로 삼지 않는다.
연결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고, 상대를 계속 불확실한 상태에 두지 않는다.
반면 수동공격으로 작동하는 침묵은 의사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방식이다정보를 주지 않고,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관계의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다. 그 침묵은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상대를 흔들어 놓는 무기가 된다. 그래서 이 침묵 앞에서는 사람이 점점 작아진다. 말을 걸 용기를 잃고, 관계를 회복할 통로도 사라진다.
이런 침묵은 관계를 보호하지 않는다.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을 고립시킨다.
침묵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어떤 침묵은 감정이 감당되지 않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멈춤이고,
어떤 침묵은 설명과 반응을 거부함으로써 관계의 주도권을 쥔다.
그 침묵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각은 분명히 다르다. 기다릴 수 있는 침묵이 있고, 사람을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침묵이 있다. 이 감각은 침묵이 방어인지 통제인지 정확하게 말해준다.
우리는 누군가의 침묵 앞에서 또는 나의 침묵 앞에서 이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 침묵은 나를 안전하게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이 관계를 보호하는가?
모든 침묵을 이해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침묵이 나와 관계를 함께 살리는지, 아니면 한쪽만 견디게 만드는지는 살펴보자.
“나는 원래 회피형이야”라는 말로는 관계에서의 책임이 면책되지 않는다. 감정을 추스르는데 시간이 필요하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면 될 일이다. 관계는 한 사람이 견디는 방식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말이 없더라도 서로를 살리는 방향으로 남이 있을 때만, 관계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