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풍랑이 일 때 하나님 임재 안에 있기

하나님과 함께 마음을 고치는 이야기

by 안블루 안유선

정신과 상담실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제가 너무 낯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이 분들은 하루 종일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하기 싫어 땅 속으로 꺼지듯 가라앉아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이런 느낌이 잠깐 있다 지나가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 같지 않은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고 합니다. 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가 잘 안 돼요.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하나도 안 들어와요. 사람들에게는 괜히 날이 서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가 나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통적인 것들이 드러납니다. 오랫동안 쌓인 긴장,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려고 애써온 시간들, 지치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책임감 속에서 어느새 하나님이 주신 자기 모습을 놓쳐 버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상담실 안을 하나, 둘씩 채워나갑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려고 했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했고 혼자서 버티다가 결국 몸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몸은 우리에게 “이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마음이 들떠서 불안하거나, 혹은 너무 가라앉아 꼼짝할 수 없는 상태는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을 오래 혼자서 버텨 온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지킬 힘이 점점 소진되면, 신경계는 과도하게 각성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가라앉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과 몸이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적정한 각성 범위가 있습니다. 인내의 창 (window of tolerance)라고 부르는 이 범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나답게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며 하나님이 주신 나다움을 비교적 온전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범위를 벗어나면 신경계는 생존 모드로 전환됩니다. 에너지가 위로 치솟을 때는 불안, 예민함, 과잉 반응으로 나타나고, 아래로 떨어질 때는 무기력, 단절감, 공허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가 잘 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거나, 신앙이 식어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영적 실패라기보다, 신경계가 과부하 상태에 들어갔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몸은 끊임없이 말을 합니다. 호흡이 얕아지고, 어깨와 턱에 힘이 들어가고, 심장이 빨리 뛰거나 반대로 힘없이 가라앉는 순간들 속에서 “지금은 안전하지 않다”라고 혹은 “이제는 멈춰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신호를 무시한 채 계속 달리면, 우리는 점점 자신과 멀어집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 인내의 창을 유지하기 더욱 어려운 환경입니다. 빠른 속도, 끊임없는 비교, 과도한 정보와 책임이 우리의 신경계를 자주 위아래로 흔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뜬 채로 혹은 깊이 가라앉은 채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이 주신 나다움은 점점 흐려집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떠오르는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지켜낸 사람, 노아입니다.

“노아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이 말씀은 노아가 흠 없이 완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 안에서 중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혼란과 폭력이 가득했던 시대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방주는 단지 홍수를 피하기 위한 거대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혼돈 속에서 생명을 지키는 공간이었습니다. 세상의 소음과 폭력이 밀려들어와도 그 안에서는 질서가 유지되고, 숨을 고를 수 있었으며, 생명이 보호받았습니다. 방주는 혼란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경계이자 피난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도 방주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자극과 비교, 과도한 책임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 우리는 쉽게 인내의 창을 벗어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은 바로 그런 방주가 됩니다. 기도가 길게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감정이 바로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 몸의 호흡을 느끼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시간은 우리 신경계를 다시 안정의 자리로 이끕니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길은 결국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과 마음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지금은 멈춰야 한다”는 작은 감각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노아가 완전한 자였다는 말을 그의 특별함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에 뿌리를 둔 영적 나르시시즘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충분히 안전함을 누리면, 우리의 신경계는 서서히 안정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흩어졌던 생각이 차분히 모이고,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리고, 하나님이 주신 ‘나다운 나’가 다시 살아납니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춰 서서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내 몸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호흡의 깊이와 심장 박동,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의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지키고 계심을 느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조용한 감각 안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마음을 고치는 이야기』

건강 선교잡지 <건강과 생명>에 기고한 글을 편집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기억은 쓰나미처럼 온다 – 몸에 잠들어 있는 감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