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에서 보는 억제된 싸우기 반응 완료

영화 속 장면을 따라가는 치유의 단계

by 안유선

신체 기반 심리치료의 원리를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자주 고민합니다. 이론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아직 낯설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쉽게 풀어내는 일은 치료 현장을 지키는 임상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관람하다가 그 해답이 될 수 있는 장면들을 만났습니다. 잘 만든 영화를 만난 감동만큼, 치료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견했다는 반가움이 컸습니다. 이 글을 통해 영화의 이야기를 빌려 신체 기반 심리치료, 그중에서도 소매틱 익스피리언싱에서 말하는 ‘완료되지 않은 싸우기-도망가기 반응의 완료(completing of unfinished fight-flight response)’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따라가 보려 합니다.


특히 다미주신경계 이론의 세 가지 신경계 상태(state)인 얼어붙기(freezing) 상태, 싸우기-도망가기(fight-flight) 상태, 사회적 유대(social engagement) 상태가 어떤 식으로 전환되는지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께는 또 다른 관점의 감상이 되기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전합니다.


영화 속 단종은 자기 뜻대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물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숙부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양이 된 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기회조차 없이 살아갑니다. 이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싸우지 못한 몸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영화 속 이야기를 따라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면서 동시에 ‘완료되지 않은 싸우기 반응의 완료’, 다시 말해 싸우지 못한 몸은 어떻게 회복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장면. 궁에서 쫓겨나다

: 억제된 싸우기-도망가기(fight-flight)

어떤 상황은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기도 합니다. 단종이 그랬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자신을 지키던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생존에 위협적일 때 우리 몸은 스스로 느끼는 것을 금지합니다.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심장은 빨라지고 호흡은 거칠어지고 근육에는 힘이 들어갑니다. 싸울 준비는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 단종이 분노를 드러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그럴 때 싸우고 싶은 에너지는 몸 안에서 멈춰버립니다.


신체 기반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이 단계는 문제가 시작된 지점이 아니라 멈춰버린 지점입니다. 몸은 정당하게 반응했지만, 그 반응을 끝낼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상태를 두고 ‘싸우기 반응이 완료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2. 두 번째 장면. 뗏목에서 뒤집히다

: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버린 얼어붙기 (freezing) 상태

싸우기 반응이 완료되지 못하면,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무기력입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겉으로 보면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유배지로 향하는 뗏목이 물속에서 뒤집혔음에도 멍하게 슬픈 시선을 고정한 채, 첨벙거릴 수도 없는 폐위된 왕의 모습에서, 싸우기 반응이 완료되지 못하면 찾아오는 극심한 무기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무기력을 신경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등 쪽 미주신경이 활성화된 상태, 즉, ‘얼어붙기(freezing)’ 반응이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되지 못한 에너지가 그대로 남아 움직이지 못한 채 마치 얼음처럼 갇혀 있는, 단순히 기운이 없는 상태가 아니며, 끝내지 못한 싸움이 멈춰 있는 상태입니다.


3. 세 번째 장면. 다시 연결되다.

: 다시 연결될 때 전환되는 사회적 유대(social engagement) 상태

얼어붙은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결단이 아니라 연결입니다.


유배된 단종은 처음 유배지에 도착했을 때 전형적인 ‘얼어붙기(freezing)’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말을 아끼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외부 자극에 최소한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위협에 장기간 노출된 신경계가 선택하는 생존 전략입니다. 이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얼어붙기 상태의 신경계는 행동 이전에 ‘안전 신호’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바로 이 안전 신호를 지속해서 제공하는 존재들입니다. 촌장 엄흥도는 그의 곁에 머물러 주고, 혼자 두지 않음으로써 관계의 기반을 만듭니다. 마을의 아낙네들은 국과 죽, 따뜻한 음식을 건넵니다. 이는 단순한 영양 공급이 아니라 신경계에 “이곳은 안전하다”라는 반복된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아이들은 단종을 ‘전하’가 아니라 친구로 대하며 함께 놀고, 이는 위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통해 단종의 신경계를 사회적 유대 상태로 다시 열어줍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단종의 신경계를 얼어붙기 상태(dorsal vagal)에서 사회적 유대 상태(ventral vagal)로 이동시키는 것.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어떤 극적인 사건 하나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함께 먹고, 곁에 있어 주고, 같이 웃는 이러한 작고 반복적인 연결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4. 네 번째 장면. 호랑이와 싸우다 - 스트레스 반응의 완료

: 완료된 싸우기-도망가기 (fight-flight)

얼어붙기 상태에서 사회적 유대 상태로 자율신경계가 전환되는 것만으로는 싸우기 반응이 완료되지 않습니다. 얼어붙어 있던 에너지가 흘러가야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윽고, 몸 안에 갇혀 있던 에너지가 마침내 흘러가기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호랑이!

억눌려 있던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순간, 단종은 활을 듭니다. 숨이 가빠집니다. 손은 아직 완전히 떨림을 멈추지 못했고, 눈앞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굳어 있습니다. 그때, 숲이 갈라지듯 흔들립니다. 낮게 깔린 숨소리,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거리.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순간. 이전의 단종이었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활을 더 단단히 쥐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네 이놈!”

그 외침은 단순한 호통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터져 나오는 소리입니다. 도망치지 않고, 굳어버리지도 않고, 마침내 맞서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에너지. 그리고 외칩니다.


“네 상대는… 나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공포의 방향을 처음으로 밖으로 돌려세우는 선언입니다. 이전까지의 단종은 쫓겨난 왕이었고, 빼앗긴 존재였고, 지켜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백성을 지키는 존재가 됩니다.


호랑이 사건 이후, 그는 깊은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백성들과 더 나은 나라를 꿈꿉니다. 하지만 역사적 현실은 마음의 치유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함을 알려줍니다. 단종은 다시 싸울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끝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죽음이 우리에게 깊은 공명을 남기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삶에는 때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바꿀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그 움직임은 깊은 감동을 준다는 것 말입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단종의 여정은 얼어붙은 신경계가 연결을 통해 다시 열리고, 마침내 멈춰 있던 싸우기 반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으며, 그 결과가 현실을 바꾸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의 방향을 되찾은 몸의 회복이 얼마나 깊은 울림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무기력하게 얼어붙어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가 아니라 안전한 연결이며, 그 연결 속에서 비로소 멈춰 있던 반응이 완료되고 우리는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본 글은 한국강사신문 칼럼, 안유선의 소매틱 심리학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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