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극을 받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습관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미 깊숙이 뿌리 박혀 있어 알면서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성향을 묘사하는 티베트어 "솀파"라는 표현이 있다. 보통 집착이나 애착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사실 더 넓은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솀파는 낚싯바늘처럼 우리를 얽매는 무언가를 말하며 보통 생각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경우에 쓰인다.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경험하는 불쾌한 기분과 비슷하다. 긴장하거나 예민해지거나 마음을 닫고 싶어지는 기분도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비판을 들을 때 우리는 솀파를 경험할 수 있다.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몰아붙이려는 기분이 드는 것이 그 예다. 나쁜 소식을 듣고 고통을 누그러뜨리려 술을 마시거나 소비를 하려는 본능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편함을 경험할 때 나오는 습관적인 반응이 바로 솀파다. 우리가 불안을 떨치려고 음식이나 술 쇼핑 등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충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긁으면 더 가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긁게 되는 가려움과도 같다. 익숙한 쾌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솀파가 우리에게 지대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스스로 솀파에 얽매이고 자신을 다잡지 못할수록 솀파의 힘은 더 강해진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프라즈나'이다. 프라즈나는 산스크리트어로 벌어지는 상황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을 꿰뚫는 시각을 얻으면 관찰자의 입장에서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프라즈나는 우리의 충동을 인정하고 이에 반응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바로 시작해 볼 수도 있다. 반응을 촉발하는 상황이 닥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앉아서 무엇이 나타나든 마음을 열고 평온을 유지하는 수행을 하면 된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강렬하거나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러한 생각을 따라가는 대신 충동을 끊고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오는 수행을 한다. 비판이 있다면 그러한 비판을 그저 알아차리되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신체적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에 반응하기보다 고통에 대한 생각을 알아차린 뒤 얽매이지 않고 놓아서 보내 주는 것이다. 즉, 감정을 분출하기 전에 그 자극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관찰하다 보면 기저에 있는 집착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불안, 즉 솀파가 유발하는 가려움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니까.
마음 챙김에 좋은 점 중 하나는 촉발하는 자극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건강한 방식으로 반응할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페마 초드론은 이렇게 말했다. “난관에 부딪혀 깨져보라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는 그저 달아나지 않는 법만 익히면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 서서히 변화할 거니까.
_by Daily Calm
‘혜안(慧眼)’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 오안의 하나. 우주의 진리를 밝게 보는 눈.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차별의 현상계를 보지 않는 지혜”이다.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나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의미한다.
그런 혜안을 산스크리트어로 ‘프라즈나(Prajna)’라고 한다. 프라즈나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정신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거다. 그러므로 프라즈나는 오히려 ‘통찰력’이나 ‘직관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프라즈나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탐구를 통해 세상의 외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모습을 간파하는 능력을 말한다. 즉, 프라즈나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몰입한 분야에 대한 일가견(一家見)을 지니게 하는 높은 수준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