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는 섬 속의 섬이다'
쿠사마야요이. 이번 여행지를 고르는데 우동만큼이나 중요했던 이유였다. 오늘 나오시마로 간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술 말고는 할 게 별로 없어 보이는 다카마쓰의 밤거리를 한 시간 정도 빙빙 걷다 들어왔는데 가방에 들어 있던 헤네시(Hennesy)가 문제였다. 샤워를 하고 몇 모금 홀짝이다가 잠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보니 새벽 3시였다. 불은 환하게 켜져 있고 열어 놓은 창문들 사이로 바람이 서늘하게 불고 있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머리가 맑았다. 맑은 정신으로 삶을 곱씹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8시.(!) 섬으로 가는 첫 배를 놓쳤다.
이렇게 된 거 뭐,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선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 싱그러운 출근 자전거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새삼스럽게 기분이 좋다. 다들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 여행 중인 내 자유로운 기분은 최고치다. 편의점에서 피치워터를 한 병 사서 마시며 여유롭게 걸었다. 혼자 여행이 이럴 때 좋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깐.
선착장은 생각보다 더 한산했고 페리 왕복권을 끊는데 창구 앞에 웬 안내문이 크게 붙어 있었다.
'All art facilities on Naoshima will be closed today
(Mon.)'
이런 xx, 순간 욕이 육성으로 나왔다.
이럴 때 혼자 여행은 좋지 않다.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더욱 심심하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었다면 선착장에 가기도 전에 나를 말렸을 거다.
창구직원이 나를 째려봤다. 갈 거니 말 거니?
어떡하지, 한 1분간 정말 치열한 고민을 한 뒤 가기로 결정했다.
배는 쓸 데 없이 거대했다. 크루즈만큼이나 큰 배에 올랐다. 탑승객은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힙플라스크를 꺼내 헤네시를 홀짝거리며 잔잔한 바다를 봤다. 작은 섬들이 동동 떠서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길 수 차례, 배는 나오시마로 진입했다.
나오시마는 섬 속의 섬이다. 버려진 섬을 가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섬으로 바꿔 놓았다. 도착 시간은 11시. 마지막 배가 5시에 있었다.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하고 자전거 대여소를 찾았다.
일반 자전거 300엔 / 기어 자전거 500엔 / 전기자전거 1000엔이라 적힌 요금표를 보고 기어 자전거를 선택했다. 언뜻 봐도 여든이 넘어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꺼내 주며 말했다, Have a nice trip! 고맙다고 말하고 출발하는데 자전거의 속도에 맞춰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정말 조용한 섬이다. 간간이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만 보일 뿐 섬주민은 다들 어디 놀러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길 곳곳에 설치예술 작품들이 있다.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데 어디선가 아마도 북유럽인으로 추정되는, 거구의 커플이 조형물 속으로 난입해서 놀다가 큰 소리로 웃으며 자리를 떴다. 모두들 어떤 사연으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 촌구석까지 왔을까, 궁금해졌다. (이 날 만난 사람 중 일본인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아까 그 거인 커플이 각각 커다란 백팩을 멘 채 걷고 있었다. 마치 군대 때 행군처럼. 지나치며 보니 힘들어 보였다. 걸어서 가려고? 빡셀텐데, 웃음이 났다.
하지만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확 빠진 건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선택한 남쪽 코스는 계속된 언덕길이었다. 기어를 맥스까지 올렸는데도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이쯤이면 내리막이 나올 법도 한데, 코너를 돌면 다시 오르막의 연속이다. 결국 내려 자전거를 끌며 전기자전거(1000엔)를 고르지 않은 나의 선택을 후회했다. 정말 산으로 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남쪽 해안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다. 내가 20대였다면 문제없었을까, 그래 적어도 그땐 군인정신이 다소 남아 있었겠지.
두 달 뒤 마흔이 된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뒤를 돌아본다. 어찌 보면 나이가 든다는 건 소소하게 포기하고, 선택의 순간을 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윽고 내리막길이 보였다. 정상이다. 11월에 반팔티셔츠 차림인데도 땀이 흥건하게 났다. 자전거를 세우고 물을 마시며 내려다보니 남쪽바다와 함께 여러 섬들이 동시에 보인다. 섬 속의 섬이란 말이 실감났다.
다시 출발하는데 페달을 밟지 않아도 되었다. 시원한 바람이 쉬지 않고 따귀를 때렸다. 내려가는 길 역시 경사가 급해서 브레이크를 잡으면 자전거가 덜덜 떨릴 정도로 가속도가 붙었다. 여차하면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긴장하며 꼬불꼬불 내리막을 한참 내려가니 모래해안이 보였다. 지도를 확인했다. 계획했던 것보다 많이 지나쳐 왔다.
자전거를 주차시키고 해안을 따라 걸었다. 저 멀리 노란색 조각이 보인다.
아- 드디어 만났다. 쿠사마 야요이 <호박>
오래전 사진으로 처음 봤을 때,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기 전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물체지만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돈데크만 주전자(옛날사람 주의) 같은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이걸 실물로 보게 되니 심박수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호박 앞에는 이미 세 명의 중국 소녀들이 포진해 있었다. 가까이 보고 싶어서 그 앞을 서성거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들은 나에게 차례를 양보해 줄 마음이 없었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사진을 삼백장 정도 찍었다. 대체 중국에선 어떤 교육을 받으며 크길래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담대한 호연지기를 가졌을까. 나는 다시 오기로 하고 이 날 유일하게 문을 연 베네세뮤지엄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건물 자체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인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세계 여러 작가들의 설치 미술과 그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콘크리트의 마법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반짝거리는 회색벽으로 둘러 쌓인 공간에 한눈에 봐도 난해한 작품들이 펼쳐져 있었다.
난 미술을 몰라서 단순한 게 좋다. 가령 빛과 색으로 구성된 인상주의 회화 작품을 보면 직관적으로 따뜻한 감성이 올라온다. 반면 대체적으로 현대 미술은 마음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현대인의 삶에 작가의 고민을 함께 얹어 느껴보려는데,
자, 관람자들아. 이 작품은 무얼 말하는 것이게?
하고 수수께끼를 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난간을 따라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더니 콘크리트 벽으로 막힌 막다른 길을 배치해 다시 돌아 내려가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든지, 똑같은 일출 사진을 사방에 수십 개 걸어 놓은 걸 봤을 때 난 당황할 수밖에 없다.
다시 <호박>을 보러 해안가로 내려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노란 호박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파제를 걸어가 손을 얹어 보았다. 바닷바람을 맞은 차가운 금속 표면이 만져졌다. 가까이서 보니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느껴지는 비주얼의 호박이었다. 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이 순간을 '마음속에 저장'했다.
다시 언덕을 넘어오는 힘든 과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자전거 반납을 하니 페리 출발 시간까지 20분 정도가 남았다. 배가 고팠다.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지 않는데 멀리 카페가 보였다. 뭐 먹을 게 있나요, 라고 물으니 쿨하게 없다고 말하는 바리스타. 꽤 단호하다. 음 오케이. 그냥 카페라떼를 한 잔 주문해서 테이블에 앉았다.
대체적으로 이번 여행은 원하는 게 잘 안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한 입 마셨다. 라떼는 상당히 맛있었다. 이 촌마을에서 이 정도 퀄리티라니? 살짝 놀라웠다. 스페셜티 원두를 직접 로스팅까지 하는 가게였다.
이때 츄리닝을 입은 한 청년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왔다. 말없이 동전을 테이블에 올리니 사장이 말없이 커피를 내려 주었다. 아마도 단골인가 보지. 청년은 커피를 받아 말없이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배를 타고나서 생각해 보니 편의점도 아니고 카페인데? 마치 무언극처럼 아무런 대화가 없이 진행된 상당히 이상한 장면이지만 당시 느끼기엔 마치 그들의 행동이 파도가 밀려왔다 빠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자전거와 호박과 이상한 카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나오시마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