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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Jul 10. 2021

자전거 페인트칠

무서운 사람들을 쓱쓱 지워주었던

영화 '환상의 빛'

훔친 자전거에 페인트 칠을


주말에는 집콕하며 영화를 봤다. '환상의 빛'. 알고보니 무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주말 내내 영화만 봤는데 내가 고른 영화들이 연달아 실패한 것 같아서 조금 속상했던 찰나... 환상의 빛을 봐서 다행이었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 부부가 자전거를 훔쳐 페인트 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부자 자전거를 훔쳐왔다며 웃고, 들키지 않게 서로 초록색으로 페인트 칠을 하며 웃고. 이 장면을 보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살 날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하지) 중학교 때는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으니까 아무래도 초등학생 때인 것 같다. 엄마가 선물로 자전거를 사줬었다. 말끔한 은색 자전거. 학교 수업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이랑 이리저리 놀러 다녔는데, 그러다 하루는 옆 동네 중학교 형들에게 불려갔었다. (나는 아마 자전거를 세워두고 친구들이랑 문방구에서 오락을 하거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겠지) 그 형들은 양아치였는데, 형들이 우리보고 돈이 있냐고 물었고 우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뻔한 대사지만 그 뻔한 '뒤져서 나오면 한 대'라는 말에 너무 쫄아서 나는 집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형들은 우리보고 이대로 도망가면 나중에 학교로 찾아가서 괴롭히겠다고 협박했는데, 우리는 알겠다고 말하고서는 자전거를 타고 슝 도망가버렸다. 사실은 집에 간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서워서 다시 그 형들에게 갈 생각을 못했던 거 같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겁이 많았던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기 무섭다며 엄마 앞에서 펑펑 울었다. 형들이 내 자전거를 다 봐버렸다고. 그래서 나를 기억할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바보같은 걱정인데, 그때는 그게 학교에 못갈만큼 큰 두려움이었나 봐. 무튼 그날 밤 엄마는 엉엉 우는 내 손을 잡고 자전거 수리점에 갔다. 그리고는 산지 별로 안돼서 반짝반짝 하는 새 자전거에 스프레이를 뿌려달라고 했다. 수리기사 아저씨가 몇 분 정도 치지직- 스프레이를 뿌렸을까. 반짝이던 은빛 자전거가 비침없는 투박한 파란색 자전거로 변했다. 나는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그 형들은 나중에도 만난 적이 없다.




김소연 여행산문집 <그 좋았던 시간에>


며칠 전에 사진첩을 봤다. 내 어릴 적 사진이 궁금하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보여주려고 오랜만에 사진첩을 들춰봤는데. '그 좋았던 시간'을 뒤적거리는 일이 마냥 속 편하지만은 않은 건 아무래도, 나에게만 좋았던 시간일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자전거를 앞에 두고 학교에 못가겠다고 울던 나는 아마도 열두살. 그런 내 앞에 있는 엄마는 서른다섯. 나는 오늘 회사에서 일이 많아서 너무 힘들었고, 홀로 남아 야근을 했고, 그런 상황들이 너무 짜증이 나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좋아하는 연예인의 유튜브만 봤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내 앞에, 내가 책임져야 하는 누군가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울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자전거 수리점에 갈 수 있는 어른이었을까. 자꾸만 풀어지는 매듭을 다시 한땀한땀 묶어낼 수 있는 사람일까.


요즘 자꾸 같은 상황을 가정하고, 자꾸 비슷한 생각을 한다. 어른의 삶이 자신 없을 때마다, 어른이 되어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살면서   번도 엄마 어른스럽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었거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뒤에서  적이 너무 많았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삶에  한명의 어른이 있다면   사람은 엄마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자꾸 거짓말만 하고, 바라는 것만 말하고,  말은 듣지도 않고, 아이처럼 유치한데.


아이가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가 어른의 나이만큼 자라게 되면

그때 알게 되는 것 같다.


아이를 어른으로 키운 사람은 너무나도 어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어른이라는 것. 나는 그 자전거를 참 좋아했다. 참 오래 탔다. 내 자전거에 푸른 빛을 입혀준 그도 오래 있으라. 그에게는 두려운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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