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아워를 지나고 있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by 체부



오랜만에 따릉이를 타고 퇴근하는 길. 입추가 지났다더니 벌써 퇴근길의 색깔이 바뀌었다. 풍경도, 하늘도. 이런 걸 매직아워라고 했던가. 마법을 부리는 시간의 한 가운데에 자전거를 타고 (지난 주 쏟아진 비 때문에 갈색으로 변해버린) 한강변을 달렸다. 고장나기 일보 직전 상태인 줄도 모르고 딱 하나 남은 따릉이를 차지하고서 '오늘 운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에 오디오북으로 <데미안>을 읽었..? 아니, 들었다. (feat. 밀리의 서재) 어릴 때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데미안>이 이런 내용이었나 싶어 새삼 놀랐다. 평소같으면 자전거로 50분이면 오는 퇴근길인데 따릉이 상태도 안 좋고, 나도 오디오북에 집중하느라 설렁설렁 페달을 밟다보니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결국 <데미안>도 다 들을 수 있었고. 밝은 내용은 아닌데, 신기하게도 힘이 났다.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내 안에 얼마나 중요한 힘들이 있을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퇴근길이었는데... 신기하다. 그치?


<데미안>을 다 듣고는 가수 장기하가 읽어주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류시화 잠언 시집)을 들었다. 책 제목과 같은 첫 번째 시를 듣는데, 이것도 분명 예전에 다 읽었던 시인데, 괜히 울컥했다. 매직아워 때문인가. 다 매직아워 때문일거다.




내 따릉이가 느려서 뒤의 사람들이 다 나를 추월해서 지나갔는데 오늘은 그것도 괜찮았고, 가양대교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무거운 가방에다가 자전거까지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랐는데 그것도 괜찮았다. 계단이 너무 많아서(가양대교 계단 진짜 많음...) 계속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도 왠지 오늘은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능력 없다는 말을 들을까 봐 걱정되는 것도, 친구들 모임에 나가 쭈뼛쭈뼛대며 괜히 자리만 채우고 돌아오는 시간들이 부끄러운 것도, 매일이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봐 걱정이 되는 것도 진짜 버틸 수 있을 기분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너무나 좋았겠지만, 사실 모든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테지. 다 알고 있는 것을 늘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그 순간만이 늘 중요한 거였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일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추었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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