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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Mar 17. 2022

대출은 10년, 추억은 평생.

팀장 급의 여성 공직자 분들을 대상으로 사흘 동안의 스피치 교육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파이널 스피치 시간이었다. 아무리 하루 종일 스피치를 3일씩이나 배웠다고 하더라도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남들 앞에서 말을 하는 건 쉽지가 않은 일이기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주제를 ‘자유 주제’로 줬다.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조금은 더 편해질 테니까.     


평가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발표를 하는 팀장님 한 분 한 분을 꽤나 냉철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평가자가 아닌, 그저 스피치를 듣는 한 명의 청중으로 만들어 버린 팀장님이 나타났다.  

   

“해외에서 한 달 살기, 다들 로망이시죠? 저는 그 로망을 실제로 이뤄 봤습니다.”     


코로나 시국 이전 일이라 하지만 해외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어디 제주에서 한 달 살기라도 쉬운 일인가. 그런데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실제로 해봤다니! 스피치에 귀를 더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큰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고 나니 여유가 좀 생겼고, 안식년까지 겹쳐서 휴가를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저 한 달 해외에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자녀들을 데리고 갈 것인데 그렇다고 하루 종일 함께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모든 걸 고려했을 때 필리핀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아이들은 오후까지 필리핀에 있는 국제 어학원에 보내 놓고 본인은 호캉스를 하며 수영도 즐기다가 아이들이 오면 함께 저녁 먹고 하면서 한 달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래도 오래 공직에 있으셔서 아무리 필리핀이었다지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셨겠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적지 않은 돈을 대출을 받아서 다녀오셨단다. 그러면서 발표는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여러분, 저는 필리핀에서 한 달을 살면서 쓴 돈을 지금부터 10년 정도 갚아가야 하지만, 그 한 달의 추억은 아마 저를 평생 살게 할 겁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평생을 살게 할 추억 하나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요?”  

   

평가자의 입장이었지만 발표에 무척이나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고, 여행에 쓸 돈을 다른 취미 활동에 쓰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로망이 하나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서 해리 포터 옷을 입고 해리포터 성을 돌아다녀보는 것이었는데 이제 더는 나이가 많아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던 차였다. -사실 이미 그때도 해리 포터 옷을 입으면 해리 포터보다는 그의 아버지인 제임스 포터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그럼에도 여행에 대한 거부감 혹은 부담감과 어려서부터의 로망이 싸울 때마다 사실은 늘 로망이 지고 말았었다. 늘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무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었고.


그런데 발표를 다 듣고 피드백을 할 때 “저는 아마 곧 저의 로망을 이루기 위한 여행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여행을 다녀오게 된다면 그건 100% 팀장님의 발표 덕분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혼자 일본 여행을 계획해서 다녀왔다. 정말 온전히 해리포터 성이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하나만 보고. 당시에 내 상황을 감안한다면 조금 무리였지만 강행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행을 가게 만든 스피치, 이보다 더 좋은 스피치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때 다녀온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렸고 그 직후 한국과 일본의 양국 관계는 무척이나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반년 후에는 코로나가 터졌고. 일본 여행을 자유롭게 갈 수 있던 막차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됐던 것이다.

      

팀장님의 발표 덕분에 정말 좋은 타이밍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살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혼자 다녀온 그 일본 여행을 지금도 돌이켜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행복감이 가득 피어오른다. 가는 그 순간까지도 고민이 많았지만 지금은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로망을 이뤘으니까. 그 소년의 작은 꿈을 이뤄줬으니까.     


‘대출을 무려 10년이나 갚아야 하지만 그 추억이 평생 살게 할 것’이라는 그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대출을 권장할 수야 없지만 우리의 로망,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리가 되더라도 고민하지 말고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평생 꺼내볼 수 있는 행복한 추억 하나,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우리를 살게 할 테니. 그것도 살맛 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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