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급의 여성 공직자 분들을 대상으로 사흘 동안의 스피치 교육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파이널 스피치 시간이었다. 아무리 하루 종일 스피치를 3일씩이나 배웠다고 하더라도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남들 앞에서 말을 하는 건 쉽지가 않은 일이기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주제를 ‘자유 주제’로 줬다.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조금은 더 편해질 테니까.
평가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발표를 하는 팀장님 한 분 한 분을 꽤나 냉철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평가자가 아닌, 그저 스피치를 듣는 한 명의 청중으로 만들어 버린 팀장님이 나타났다.
“해외에서 한 달 살기, 다들 로망이시죠? 저는 그 로망을 실제로 이뤄 봤습니다.”
코로나 시국 이전 일이라 하지만 해외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어디 제주에서 한 달 살기라도 쉬운 일인가. 그런데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실제로 해봤다니! 스피치에 귀를 더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큰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고 나니 여유가 좀 생겼고, 안식년까지 겹쳐서 휴가를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저 한 달 해외에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자녀들을 데리고 갈 것인데 그렇다고 하루 종일 함께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모든 걸 고려했을 때 필리핀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아이들은 오후까지 필리핀에 있는 국제 어학원에 보내 놓고 본인은 호캉스를 하며 수영도 즐기다가 아이들이 오면 함께 저녁 먹고 하면서 한 달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래도 오래 공직에 있으셔서 아무리 필리핀이었다지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셨겠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적지 않은 돈을 대출을 받아서 다녀오셨단다. 그러면서 발표는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여러분, 저는 필리핀에서 한 달을 살면서 쓴 돈을 지금부터 10년 정도 갚아가야 하지만, 그 한 달의 추억은 아마 저를 평생 살게 할 겁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평생을 살게 할 추억 하나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요?”
평가자의 입장이었지만 발표에 무척이나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고, 여행에 쓸 돈을 다른 취미 활동에 쓰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로망이 하나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서 해리 포터 옷을 입고 해리포터 성을 돌아다녀보는 것이었는데 이제 더는 나이가 많아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던 차였다. -사실 이미 그때도 해리 포터 옷을 입으면 해리 포터보다는 그의 아버지인 제임스 포터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그럼에도 여행에 대한 거부감 혹은 부담감과 어려서부터의 로망이 싸울 때마다 사실은 늘 로망이 지고 말았었다. 늘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무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었고.
그런데 발표를 다 듣고 피드백을 할 때 “저는 아마 곧 저의 로망을 이루기 위한 여행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여행을 다녀오게 된다면 그건 100% 팀장님의 발표 덕분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혼자 일본 여행을 계획해서 다녀왔다. 정말 온전히 해리포터 성이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하나만 보고. 당시에 내 상황을 감안한다면 조금 무리였지만 강행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행을 가게 만든 스피치, 이보다 더 좋은 스피치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때 다녀온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렸고 그 직후 한국과 일본의 양국 관계는 무척이나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반년 후에는 코로나가 터졌고. 일본 여행을 자유롭게 갈 수 있던 막차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됐던 것이다.
팀장님의 발표 덕분에 정말 좋은 타이밍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살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혼자 다녀온 그 일본 여행을 지금도 돌이켜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행복감이 가득 피어오른다. 가는 그 순간까지도 고민이 많았지만 지금은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로망을 이뤘으니까. 그 소년의 작은 꿈을 이뤄줬으니까.
‘대출을 무려 10년이나 갚아야 하지만 그 추억이 평생 살게 할 것’이라는 그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대출을 권장할 수야 없지만 우리의 로망,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리가 되더라도 고민하지 말고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평생 꺼내볼 수 있는 행복한 추억 하나,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우리를 살게 할 테니. 그것도 살맛 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