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지난밤 베를린에서 저녁에 출발한 우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바이마르 집에 도착했다. 밤에는 동네 버스 배차 간격이 제법 길어져서 까딱하면 바이마르 중앙역 앞에서 내린 다음에 한참을 기다리곤 한다. 의외로 베를린에서 사놓기만 하고 먹지 못한 덕에, 우리는 면식가 여성들답게 집에 오자마자 컵라면을 끓여 먹고 달게 잠이 들었다.
오늘은 수아가 오고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가 종종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혼을 내셨다. 다소 엄하게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런 엄마 덕분에, 나는 현재에도 어느 도시에 거주하든 최소한 매 주일 교회에 발걸음 한다. 구성원과 시설은 달라도 교회에 가면 보통 집(또는 먼 친척집 정도)에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집은 누구에게나 복잡한 감정이 드는 곳이지만. 세계 어디에서나 그런 느낌이 드는 장소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사실 좀 멋진 일이다. 내게 교회는 익숙한 느낌을 비슷하게 공유하는 개별 장소들이라기보다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마치 어떤 한 장소로 연결되는 숨겨진 차원의 문들 같다.
요즘 수아에게 일요일은 일을 시작하는 날이다. 뉴스레터를 발송하는 회사 업무 특성상 남들이 일을 재개하는 월요일 전날 미리 준비가 필요한 까닭이다. 수아는 언젠가 내게 자기 영어 이름이 조슈아 Joshua라고 소개했다. 이미 바쁜 서울살이와 문턱 높은 몇 교회 공동체에서의 경험 때문에 부지런히 교회를 찾는 편이 아니게 되었더라도, 일요일에 일을 해야 하는 건 분명 수아 마음에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아가 독일행을 계획할 적부터 막연히 머릿속에 수아와 나란히 교회 가는 길을 상상했지만, 그는 이번 여행에도 예외 없이 주일 이른 아침부터 업무를 시작해야 했다.
여행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일에 집중하며 아침을 열었다. 수아는 아침부터 팀원들과 원격 소통하며 업무를 보고,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동안 오래 미루고 있던 교회 주보 시안을 완성했다. 내가 이곳에서 다니는 한인교회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교회는 바우하우스 대학교, 리스트 음악학교가 매해 끌어모으는 학생들을 주축으로 세워졌다. 이곳에 직접 오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독일 소도시에 이렇게 활성화된 한인 공동체가 있는 것은 제법 특수한 경우다. 시각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은 나로선 처음 오던 날부터 한글 97로 작성되었을 법한 무드의, 자간과 줄 간격이 너무나도 좁아 가독성이 나쁜 오래된 주보가 줄곧 마음에 걸렸는데, 20주년을 기념하며 봉사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수아가 말하길 뉴스레터 작업을 하다가 팀원들이 '늪에 빠지는 날'이 있단다. 아무리 시간을 투자하며 글을 손보아도 글이 완성되기는커녕 계속해서 글쓰기 작업 속에 다 같이 맴돌게 되는 날. 수아도 일을 서둘러 마치고 웬만하면 함께 길을 나서고 싶어 했는데 오늘이 바로 늪에 빠진 날이었다. 오늘 결국 그는 한국시간으로 새벽 1시(독일시간 저녁 6시), 그러니까 업무를 시작한 지 12시간 가까이 되어서도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나는 집에 수아를 혼자 두고 교회에 갔다. 오늘은 부활절 전 주일. 교회력 상으로, 오늘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것, 그리고 다가오는 금요일엔 그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는 것, 다음 주일에 예수의 부활을 기념한다. 즉 오늘은 예수님께서 비교적 산뜻하게 작은 나귀를 타고 성 안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시지만 월화수목 동안 체포를 당하고 법정에 서고 온갖 고난을 당하다 금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그가 업신여겨지고 외면당할 줄 알면서도 인간에게 찾아와 선물하고자 했던 것은 참된 의미의 자유와 안식이다.
안식.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하는 나날이면 비 신앙인 남자 친구는 내게 종종 야, 하나님도 쉬셨어,라고 놀린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가 업무를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부담이 된다. 일다운 일 말고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읽고 쓰고 보고 말하고 기억하는 이 모든 정보의 총량만 생각해도 삶은 참 노동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하게 되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많이 일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왜 이렇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게 되었을까. 한 없이 높아질 수 있는 기준에 맞추려는 이 끝없는 몸부림과 고통. 인생은 자주 제법 길고, 의미가 없으면 그래서 너무 지루하거나 아프다. 자꾸 까먹지만, 삶은 그래 봐야 내일 지는 들꽃 같은 것이다. 내가, 우리가, 사람들이, 모두 잘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쉴 줄을 알았으면 좋겠다.
카톡으로 수아는 단 것을 먹을 수 있는 카페가 있을지 내게 물어왔다. 주일이어서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저녁 6시가 다되었으니 집 밖으로 나오면 모두 닫았지. 비단 당분 섭취때문만이 아니라 아마 집 밖에 나와서 숨좀 돌리고 싶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아쉬운 대로 케이크를 두 조각 사서 집에 왔다. 이어지는 팍팍한 업무, 종일 거진 파자마를 입고 있는- 어쩐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둘러싼 하루. 그 끝을 수아는 조금이나마 예쁘게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우리는 괜히 예쁜 초를 켜고,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그릇에 케이크를 모아 담은 다음, 정교하게 생긴 시계를 옆에 두고 앉았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먹어치우면, 다 사라져 버릴 것들을 앞에 두고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나는 이것이 영원을 찾는, 안식을 바라는 기도의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아, 오늘도 수고 아주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