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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당동붓다 Oct 21. 2020

서한(序翰)

동아야.

네가 처음 엄마에게 왔음을 알게 된 날, 엄마는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다.

이상하게도 나는 너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 너무 떨려서, 굳이 40분 거리의 외할머니 집 앞까지 차를 타고, 외할머니네 집 앞 병원에 갔어. 

너는 너무 건강했고, 외할머니는 네가 우리 가족에게 온 것을 축하하자며, 엄마와 함께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임신을 한 엄마한테 말이지. 한 잔은 괜찮다고.

너는 그렇게 쿨한 환대를 받으며 나에게 왔다.


동아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는 아주 자신감에 차 있었어.

너를 대단히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육아 따위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돌이켜보면 네가 뱃속에 있을 때 정말 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처음으로 엄마의 의지대로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해 대학원에 입학했고, 처음으로 직접 작은 회사를 꾸렸어. 아빠와 처음으로 이사란 것을 해보기도 했단다.

그때의 엄마는 자신감에 차있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잘할 것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있지, 동아야.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더라고.

너를 병원에서 데리고 온 첫날부터 보자기는 어떻게 싸는지, 너는 왜 그렇게 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자꾸 눈만 떼굴떼굴 굴리는 아빠에게 화만 냈어.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산후도우미 이모님도 오시고, 외할머니와 할머니가 도와주셔서 어찌어찌 익숙해지게 되었어.

그런데 희한하게 조금 익숙해지니까 이상하게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은 거야. 

엄마는 평소에 다른 사람을 잘 신경 쓰지 않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들보다 동아가 잘 잤으면 좋겠고,

남들보다 동아가 밥을 많이 먹었으면 좋겠고,

남들보다 동아가 똑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동아가 남들보다 잘 자지 않으면 엄마가 수면 패턴을 잘 형성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고,

동아가 남들보다 밥을 잘 먹지 않으면 엄마가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미안하고,

동아가 남들보다 말을 빨리 하지 않으면, 엄마가 동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미안했어.

엄마는 그냥 늘 동아에게 미안했어.

남들보다 잘하지 못하는 것만 눈에 들어와서, 남들보다 잘하는 것은 하나도 보지 않고 엄마는 그저 동아에게 미안했고, 이런 상황들에 화가 났어.


그런데 있지, 동아야.

그때 엄마가 정말 이상했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게 진짜 이상했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남들과 비교하는 게 뭐하는 짓이람! 동아는 동아대로 아주 잘 크고 있는데!'

그래서 그때부터 엄마는 육아서적을 읽지 않기로 했어.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는 책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하지 못한 엄마가 바보가 되는 것 같았거든.

엄마는 동아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동아가 좋을 대로 하기로 했어.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고, 동아랑 엄마랑 둘이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어.

동아가 자고 싶지 않으면 자지 않고,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줬고, 함께 잠들었어.

먹고 싶지 않으면 먹을 때까지 기다렸어.

책을 읽기 싫은 날은 질릴 때까지 페파 피그를 봤어.


하지만 동아만큼 엄마도 엄마에게는 너무 소중해서, 동아에게만 좋고 엄마에게는 좋지 않은 일들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어. 

엄마는 동아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같이 사는 건데,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게 어딨어. 

희생하면 보상받고 싶고, 대리 만족하고 싶어 하니까. 그러다 동아의 인생이 성공하면 엄마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고 착각할지도 몰라. 엄마도 아직 36년밖에 살아보지 못했고, 동아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만큼 엄마의 인생도 궁금해.


그러니 동아야.

동아는 동아의 인생을 살아.

다른 사람이 잘 산다고 사는 인생 말고, 엄마가 좋아하는 인생 말고.

동아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반찬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할 때 기분이 좋고 싫은지 잘 기억해야 해.

그리고 남들이 뭐라 그래도 동아가 좋아하는 것들은 해내고 지켜내야 해.

그런 것들이 쌓여 동아가 되는 거거든. 

그렇지만 한번 좋아한다고 해서 계속 좋아할 필요는 없어.

동아는 어렸을 때 핑크색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파란색을 훨씬 좋아하잖아.


엄마가 어렸을 때는 무조건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했고, 엄마가 조금 컸을 때는 어떤 꿈을 꾸며 사는지가 중요했거든? 근데 지나고 보니 사실 그런 거는 엄청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엄마는 동아가 어떤 직업을 가지는지, 어떤 일을 하고 살지 지금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동아는 어떤 사람인지 동아가 잘 알고, 어떻게 살면 동아의 인생을 절실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으로 자란다면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해.


엄마는 동아를 너무너무 사랑해.

동아를 사랑하는 이유는, 동아가 예뻐서도 아니고 엄마 말을 잘 들어서도 아니야.

동아가 동아여서 사랑해.

동아가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 엄마에게 알려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하지만 가장 힘들고 어렵운 순간에는 엄마를 찾아주면 좋겠어.

이 세상 마지막 끝에 동아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


엄마가 쓴 이 몇 편의 글은, 동아랑 함께 8년을 살면서 문득문득 든 생각을 정리한 거야.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글들이지만, 엄마가 무엇인가를 써내고 동아에게 읽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동아의 엄마로 살 수 있게 해 주어 고마워.


사랑한다, 동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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