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일주일에 한 편, 늦으면 한 달에 한 편씩은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내 일상에 꽤나 힘이 됐다. 점심시간 조금, 저녁시간 조금 틈을 내어 글을 써보고, 다듬고, 완성하고, 친구들이 달아주는 댓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글을 다 쓸 때는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마치 40분 동안 아줌마 아저씨들과 헬스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마치 내가 50킬로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처럼, 내가 뭐라도 된 기분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결과물이 없는 느낌이라, 왠지 긴 호흡의 무언가를 써보고 싶었다. 혼자 하기는 재미없으니, 올 초에 한국드라마작가협회 교육원이라는데 수강신청을 해서 어제 처음으로 드라마 작가 기초반 수업을 들었다. 어제 첫 수업을 했는데, 그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 중 하나는 '막장드라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내의 유혹이나 펜트하우스 같은 드라마를 막장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보는 이유는 작가의 압도적인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나는 개연성? 모르겠고, 내 이야기는 겁나게 재밌다!'는 기조로 압도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얼굴 밑에 점 하나 찍고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는 상상도, 매번 죽었다, 살아났다 하는 말도 안 되는 서사들도 결국에는 그렇게 믿어버리게끔 사실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압도적인 힘은 타고나는 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꾸준함에서 나온다. 한번 휘갈겼다고,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파워가 나오겠는가. 지루하게 긴 시간 동안 고민하고 취재하고 쓰고 지우는 시간이 반복되었을 테다. 그 긴 시간 동안을 발바닥과 싸우고, 엉덩이와 싸우고 나면 '내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야. 이건 진짜 잘 아는 거야.' 하는 깊숙하고 무거운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나에게 제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우길 수 있을 때, 남들도 믿는다.
너 진짜구나.
옆에서 들으면 콧웃음 치며 무시할 내용도, 충만한 자신감에 반짝이는 눈동자로 이야기하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습게도 남이 나를 믿게 하려면, 내가 나를 믿게 해야 한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수학시험을 앞둔 날이었다. "시험공부했어?"라고 물어보니, "응. 학교에서도 계속 보고, 연습 시험도 봤는데, 나 잘해."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빵집에 가서 아침을 사 먹었고, 아이는 자신이 영어학원에서 배운 단어를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시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제 아이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에게 자신을 믿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진짜 잘하는지 보기 위해 문제집 한번 풀어보자는 쓸데없는 말로 자신감을 꺾을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잘한다고 믿지 않았으면, 문제집을 풀어보고 가자고 먼저 말했을 아이였다. 물론, 까불다가 문제를 틀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점수 몇 점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반짝이는 눈빛을 기억한다. 내가 생각하는 학창 시절은 이런 순간을 모으는 과정이다. 매일 꾸준히 공부하며 나를 믿는 순간들을 모으는 과정. 그런 시간들이 자신감을 만들 것이고 언젠가 압도적인 힘을 뿜어낼 것이다.
사실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과정은 내가 나를 믿게 하는 과정이다. '야, 너 잘하고 있어. 진짜 잘할 거야.'라고 매일 나에게 얘기하고 있다. 언젠가 뿜어낼 나의 압도적인 힘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