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ry Starry Night> , Lianne La Havas
1.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2018년 여름, 그러니까 이제 막 내가 런던에 발을 디뎠던 그때부터 시작된다. 두바이에서 출발해 약 5시간 정도의 비행. 도착지 런던. 곧 있으면 내가 꿈에 그리던 영국에 간다는 생각에 들떠있던 나도 더디게 흘러가는 비행시간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던 참이었다. 창밖을 내다보아도 아직 하늘밖에 보이지 않으니 이내 시선을 내 앞의 작은 화면으로 돌렸다. '볼만한 영화가 어디 있나 보자~' 벼룩시장에서 아주 괜찮은 물건을 발견하듯 신중히 움직이던 내 손가락은 한 영화에 멈추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상영했을 때, 영화관에서 3번 보았고, 그 후로는 집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보고 또 본 영화였다.
'드디어 나도 보는구나... 직접 보는구나....'
영화의 전개는 가볍지 않게 흘러가는데 나는 평소와 달리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왔다. 여러 번 볼 때마다 진지하게, 감명 깊게 봤던 작품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영화가 따분해서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랬던 거였다. 아무리 보려고 집중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아 결국엔 영화를 뒤로 돌리고 돌려, 가장 좋아하는 장면에 멈추어놓았다. 바로 마지막 부분이었다. 고흐의 편지가 낭독이 되고,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으로 영화가 끝나는 장면. 그리고 책장이 넘겨지듯, 등장인물과 그 인물들을 그린 빈센트의 그림이 차례로 나오는 장면. 동시에 따뜻하게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익숙한 노래, <Starry starry night>. 비행기의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런던이 보이기 전까지,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어가며 <러빙 빈센트>의 엔딩 크레디트를 여러 번 돌려가며 이 곡을 들었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담은 <러빙 빈센트>를 본 후, 빈센트라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가게 되었다.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자연과 예술을 사랑했던 화가.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고 그것을 치열하게 그렸던 예술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장 따뜻한 온도를 품고 있던 사람이라고. 영화를 통해 그를 더 알게 된 후, 이 화가를 더 깊이 알아가고 싶어 졌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난, 이 따뜻한 예술가를 깊이 떠올리면 종종 가슴이 뭉클거리곤 한다. 그만큼 나는 그를 몹시 사랑한다.
'런던에 가면 내셔널 갤러리를 꼭 가야지. 자주 가야지.'
런던에 도착하면 무조건 내셔널 갤러리부터 가야 했다.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있고, 무엇보다 빈센트의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해바라기>와 <의자>도 이곳에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던 나는 잔뜩 기대도 하고, 조금 다급하기도 했다.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그의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이다.
2.
두근거리는 마음을 혼자 진정시키며 내셔널 갤러리에 처음 갔던 날. 나는 안내책자를 펼쳐 위치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몰려있는 방으로 갔다. 다른 작품들보다 일단 이 작품들 먼저! 이곳에 오면 가장 먼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던 그림들 말이다.
모네, 세잔, 드가, 마네, 피사로, 보자 보자... 고갱,... 어... 저기 있다.
저 멀리 사람들이 유난히 몰려있었고,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저기가 그곳이구나. 심박수가 조금 빨라지는 듯했다. 그 많은 사람들 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노란색은 그냥 노란색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던,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그 노란 꽃이 점점 더 가까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나도 사람들 틈에 섞인 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큼 가슴을 쿵쾅거리며 작품을 보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그림을 딱 한 점밖에 팔지 못했던 고흐. 그런 그의 작품 앞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이미 감격스러웠다. '아 빈센트. 당신을, 당신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아요. 당신이 살아있을 때 이랬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그렇게 애틋해하며 그의 그림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 인파 사이에서도 꼿꼿이 서서 그의 작품을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 지켜보았다. 빈센트가 만들어낸 색과 선과 모양과 붓의 터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똑똑, 어떤 그림 앞에서 누군가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노란 해바라기도, 의자도 아닌 바로 '사이프러스 나무' 앞에서.
황금빛 밀밭에 구름과 바람이 가로로 넘실대는 것 같은 풍경의 가장 오른쪽에 짙고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꼿꼿하게 서있는 그 그림 앞에서. 누군가가 그랬는데. 언젠가 그림이 말을 걸 거라고. 그 언젠가가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던 건 바로 빈센트였다. 그림을 통해 화가의 말이 들렸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딱 그랬다.
쉽진 않겠지만, 이 나무처럼
그리고 내가 이 마음을 갖았던 것처럼,
너도 굳게 서 있으렴.
언제나, 늘, 용기를 내렴.
그 우뚝 선 나무 앞에서 그는 그렇게 나를 위로했고, 나는 툭, 툭, 감추지 못할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림을 보고 울다니. 그림으로 위로를 받다니. 말도 안 돼.' 하면서. 눈물이 참 따뜻했다.
할머니가 돼서도 이 순간만큼은 절대 잊지 않았으면. 빈센트가 보고 싶어 달려갔던 내셔널 갤러리 43번 방에서 그를 가까이 만났던 그때 그 순간. 마치 그가 '사이프러스 나무'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것 같던 그 벅차고도 짧은 순간. 우리가 통했던 그 감격스러웠던 순간.
마침내 내 욕심은 더 커져버렸다.
그의 작품을 만나러 떠날 거야.
<별이 빛나는 밤>을 봐야겠어.
그의 자취를 밟아야겠어.
3.
런던에서 산다는 건 빈센트만 떠올려도 축복 그 자체였다. 그의 그림이 걸려있는 내셔널 갤러리를 마음먹으면 갈 수 있었으니. 게다가 그의 흔적이 있는 다른 나라들도 한국에 있는 것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방문할 수 있었으니까. 암스테르담, 파리, 남프랑스, 그리고 뉴욕까지.
빈센트의 자취를 밟는 여행은 이미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시작되었고, 그다음 여정지로 갈 기회는 비교적 금세 다가왔다. 바로 그해 늦가을, A과 같이 갔던 파리 여행이었다. 근 2주를 붙어지내며 같이 여행했던 A와 파리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혼자가 된 내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갔던 곳은 바로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파리 여행 마지막 날의 일정은 '오르세 미술관' 밖에 없었다. '드디어 오르세다! 드디어!' 미술관 근처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나는 너무나 설레었다. 바로 이 미술관에 빈센트의 다른 작품들이 있고, 그중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작품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러빙 빈센트>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작품,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아 직접 보면 어떤 느낌일까! 이거 말고도 다른 작품들도 많던데. 빨리 보고 싶다...!'
드디어 그 미술관 앞에서 줄을 서던 그날 아침, 나는 감격에 벅차 두서없이 짧은 글을 메모에 끄적이며 입장을 기다렸다.
(중략) 오르세 미술관에 가고 싶어 파리를 꿈꿨던 내가 드디어 그 오르세에 왔다. 늦가을의 찬 공기, 가을 햇빛, 햇빛에 비치는 사람들... 지금 나는 그 모든 풍경을 가득 느끼며 줄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조급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는 지금 파리와 가까운 런던에 머문다는 사실. 이렇게 여행하기 위해서, 넘치도록 느끼기 위해서, 마음이 일렁이고 눈시울이 붉어지기 위해서, 나는 런던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나 보다. 오늘은 어느 작품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질까. 밀레의 작품일까, 고흐의 작품 중에선 어떤 작품일까. 입장을 앞두고 자꾸만 마음이 벅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