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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Nov 25. 2020

모네와 나란히 서서 듣던 노래

Love will find a way, Kenny Lattimore



1.


고흐,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드가, 고갱...


파리에 대해 기대했던 건 맛있는 빵과 디저트도, 에펠탑이나 샹젤리제 거리도, 심지어 파리의 낭만도 아니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그러니까 파리에 있는 그 예술가들의 자취와 작품을 보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A와 파리를 여행하기로 정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꼭 하고 싶은 걸 떠올려봤다. 그리고 바로 딱 두 가지가 떠올랐다.


오르세와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것.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에 갈 것.   


'지베르니 (Giverny)'.

파리와도 가깝고, 클로드 모네가 살던 집과 정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해서 많은 여행자들이 방문하는 곳.


그의 정원이 담긴 사진을 보고 그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버린 나는 언젠가 파리에 가면 이곳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바로 A에게, 파리에 가면 지베르니도 가자고 제안했고, 그녀도 흔쾌히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희미하던 우리의 파리 여행 계획 안엔 '지베르니 당일치기' 일정만큼은 선명하게 쓰여 있게 되었다.





2.


"지베르니를 갔다가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는 거야.”

"좋아, 딱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대표적 화가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그는 말년에 지베르니에 대지를 사서 집과 정원을 지었고, 그곳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때 그린 작품은 대부분 지베르니의 정원을 소재로 한 것이다. 특히 모네는 '수련'을 죽을 때까지 27년에 걸쳐 무려 300여 점이나 그렸는데 그게 바로 <수련> 연작이다. 어떻게 300점이나 그리지? 거의 1년에 10점은 그렸다는 건데. 예술가가 하나의 소재에 꽂히면 이렇게 무섭게 그리는구나, 하고 나는 의아했다. 그리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만큼 모네의 정원은 곧 그에게 영감이었겠지? 하고.


모네의 공간에 먼저 갔다가 그의 <수련> 연작이 독보적으로 많이 걸려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3.



모네의 집에 들어가는 길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 길에는 다른 화가의 아뜰리에도 있었고, 왠지 고요하게 잠들다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민박집, 그리고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살랑이는 나무들이 있었다. 아 이런 곳에서 며칠 묵었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만 머무는 나의 일정이 몹시 아쉬울 정도였다.


모네의 집에 도착하니 긴 줄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래, 쉽게 들어갈 리가 없지. 이곳에 들어가면 그 아름답다는 정원과 그의 공간을 볼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어서 들어가고 싶어 마음이 설렜다. 마냥 그 긴 줄의 일부로만 있기엔 동네가 너무 어여뻤다. 나와 A는 번갈아가며 주변을 걷다 오기로 하고, 각자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느새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드디어 입장.




모네가 말년에 머물러 작업했던 이곳은 순식간에 구경할 수 없는 만큼 컸다. 이렇게나 큰 땅에 자기만의 기지를 만들어 죽을 때까지 작업을 하다니. 그는 행복했을까? 매일이 평화로웠을까? 만족스러웠을까? 나는 오래전 이곳에서 머물던 그가 궁금해졌다. 큰 공간을 둘러보며 최대한 천천히 이곳을 감상해야겠다고 도 생각했다. A도 그랬던 걸까? 우리는 자연스레 떨어져서 그곳을 감상했다.



온통 아름다운 것들 투성이었다. 모네의 정원으로 가는 길에는 빛과 나무들과 꽃들이 잔뜩 있었다. 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휴식을 하는 것 같았다. 어찌나 꽃들이 많던지 자기만의 색깔을 아름답게 뽐내는 이들을 핸드폰으로 잔뜩 찍었더니, 내 사진첩은 어느새 꽃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엄마 사진첩인 줄 알았다.



그의 정원 속,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마치 하이라이트로 걸어가는 여정 같았다. 나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햇살도 느끼고, 버드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나뭇잎들이 파르르 하고 내는 소리도 듣고, 꼭 입술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프렌치들의 대화도 들었다.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불어 소리는 꼭 노랫소리처럼 들렸고. 그때부터였나. 땡큐보다 메흐씨가 더 좋아진 게. 익스큐즈 미 보다, 엑스 큐즈 모아 가 더 좋아진 게. 전혀 관심이 없던 불어가 갑자기 배우고 싶어 진 게.





여느 때처럼 혼자 걷는 동안엔 배경음악은 필수다. 음악은 무작위로 골라 넣은 디즈니 ost들.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그냥 오랜만에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모네의 정원으로 가는 길에 내 귀에 들리던 곡은 디즈니 ost지만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음, 이런 곡도 있구나?'   


멜로디가 참 좋다고 느끼며 걷다 보니 곧이어 연못이, 그 하이라이트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사진으로 보았던 연못은 여름색으로 푸르렀는데, 그날 내가 바라본 풍경은 색이 조금 달랐다. 가을이었다. 지극히 가을이었다.




“.......!!!!.......”


두 눈에 포착된 장면에 압도되거나 영감을 받아서 눈물이 난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유럽을 여행하며 몇 번 그랬고, 그중 한 번이 이때라고, 나는 웃으며 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연못을 품고 있던 가을빛 정원은, 두눈에 보이자마자 고스란히 영감이자 감격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렇게나 감격할 줄 몰랐던 나는 갑자기 붉어진 눈시울에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치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 소리가 커지듯,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가 점점 내 귀에 크게 들리는 듯했다.


I know Love will find a way

Anywhere we go I'm home I'm home

If we are there together

Like dark turning into day

Somehow we'll come through

Now that I've found you

Love will find a way


눈시울을 붉히며 연못을 바라보는 작은 징검다리 위에서, 나는 마치 누군가가 내 옆에 같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상상 속 그 누군가는 바로 클로드 모네였다. 아, 그가 이 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감상하는 나와 그런 내가 당연하다는 듯 뿌듯하게 미소 짓던 모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정말 아름답지?"


나는 그제야 이 대단한 화가가 조금 더 이해되었다. 왜 그가 이 정원을, 이 연못을 그렇게 많이 그렸는지. 그가 그린 어여쁜 꽃들은 왜 그런 색이었는지. 왜 쨍한 빨간색이었는지. 왜 희미한 보라색이어야만 했는지. 왜 수련을 몇백 점이나 그렸는지.


그리고 확신했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그가 행복했던 게 분명하다고.



다리 위에서 모네와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정원을 나오며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이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고맙게도 그와 함께했던 깊고 짙은 감상은 고스란히 음악에 보관되었다. 그 정원에서 처음 들었던 디즈니 ost <Love will find a way>에 말이다.



지금도 이 곡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든, 잠시 짬을 내어 다시 기억 속의 지베르니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때의 가을이 떠오르며 모네의 정원 속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그 연못이 보이는 다리 위에 선다. 그러면 모네와 상상 속에서 만났던 그 순간이, 그때의 감격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 지금까지도.



Love will find a way, 2018


-

지베르니를 다녀온 다음날, 우리는 예정대로 오랑주리 미술관에 갔다. 그리고 마침내 미술관 1층에서 그의 대작을 만났다. 연못과 시간과 빛이 만들어낸 영감을 그대로 그려낸 그의 <수련>을 한참 바라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잔뜩 몰입해서 색을 칠하는 모네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그림들은 당연히 탄생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클로드 모네만 그려낼 수 있는 대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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