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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Nov 19. 2020

내 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도시  

<Si Tu Vois Ma Mère> , sydney bechet



영화 <Midnight In Paris>의 오프닝 장면과 배경음악을 기억하나요?




-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작부터가 조금 남다르다. 그 어떤 등장인물도, 대사도 없이 감독은 약 3분 동안 장면들만 보여준다. 음악 한 곡과 함께. 따단 따다단, 따단 따다단, 하며 관악기가 멜로디를 읊조리면서부터 씬들이 조용히 책장이 넘겨지듯 넘어가는데 그건 바로 '파리의 모습'이다. 


센 강과 에펠탑, 파리의 어느 거리, 물랑 루주,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몽마르트르, 카페, 뛸르히 공원, 루브르 박물관, 콩고르드 광장, 파리의 낮, 그리고 밤, 맑은 날, 그리고 비 오는 날, 돌고 돌아 다시 에펠탑.


여기가 파리구나? 하며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음악이 끝나고, 남자 주인공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운을 뗀다.


This is unbelievable! Look at this!

(정말 기가 막히다! 여기 좀 봐!)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러 번 보았고, 볼 때마다 역시 좋았다. 특별한 건, 어느 분기점을 기준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 그 분기점은 바로 파리에 갔다 오기 전과 후였다.





1.


그러니까 내가 처음으로 파리에 간 건, 여행 메이트 A와 함께한 더블린 여행이 끝난 직후였다. 더블린 공항에서 에어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건너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도시에 대해 별 큰 기대가 없었다. 딱 하나 있었다면 그저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모네와 고흐의 그림을 본다는 것. 그 외에는 음... 에펠탑을 보는 것? 첫 발걸음은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있으니까 한 번쯤은 가볼만한 도시. 내 기대는 딱 그 정도였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한 건, 저녁 여덟시즘이었다. 오페라 역이라고 하는 곳으로 나와 숙소까지 걸어가며 배고픔과 이동에 지쳤던 한국인 여행자 둘에게 파리의 밤, 그 도시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올 리가 없었다. 겨우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은 후에야 앞으로의 여행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세밀한 조사와 정보는 거의 없는 우리의 여행답게 말이다. 


“내일 뭐할까?”

“언니 이거 어때?”


마침 숙소에 있는 가이드북을 하나 집어 든 우리는 책에 쓰여있는 일정처럼 여행하기로 정했다. 정말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간 것이었다. 그 도시를, 그 파리를 말이다. 





2.


'공기가 좀 텁텁하네? 건물들은 왜 다 높고 거리가 꽉 막혀 보이는 거야. 좀 답답하네.'



다음날, 본격적인 파리 여행의 시작에서 내가 느낀 파리의 첫인상은 이랬다. 얼른 탁 트인 곳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일단 나와 A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고 시작하자. 간단히 브런치를 먹으며 우리는 가이드북 여행 일정 Day1에 쓰여있는 대로 이동해보기로 결정했다. 



"일단 구글맵에 샤이오궁을 치고 가보자. 콩코르드 역? 거기로 가야 한대."

"언니.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교통권 끊으면 되겠다."

"그래그래. 딱이야."




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불어가 여기저기 잔뜩 쓰여있는 걸 보니 여기가 프랑스가 맞는구나 싶었다. 이 단어는 뭐지, 저건 또 뭘까. 그때 A가 재밌는 얘기를 꺼냈다. 


"언니 나 고등학생 때 제2 외국어가 불어였거든? 수업 때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인사하려고 반장이 일어나잖아. 그때 반장이 차렷, 경례하면 우리 다 같이 봉쥬흐~ 하고 인사했다. 그러면 선생님이 봉쥬흐~ 마드모아젤~ 이랬다."


"아 진짜? 불어였어? 차렷 경례하고 봉쥬흐는 뭐야. 아 웃기다. 오 그러면 불어 좀 알겠네?"


“다 까먹었어. 봉쥬흐랑 메흐 씨, 이런 거밖에 몰라~”



수다를 떨고 웃고 하다 보니 어느새 콩코르드 역에 도착한 우리였다. 그리고 역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아 대박!"





아까부터 원했던 곳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곳 말이다. 콩코르드 역에서 나오면 '콩코르드 광장'이 나올 거라는 걸 전혀 몰랐던 우리였다. 그리고 숨통이 트이고 시원해진 나의 시야에 파리가 다시 보였다. 아주 예쁘게. 온통 불어뿐인 표지판, 화려하고 예쁜 장식, 그리고 지나가다 보이는 가로등도 모두 다.




2.


".... 대박... “

"헐 대박이다 언니."


파리에 대해 정말 몰랐네. 이 유명한 역으로 나오면 콩코르드 광장인데 그곳에서 에펠탑이 보이는 것도 전혀 몰랐으니. 저 멀리 에펠탑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소름이 조금 돋았다. 아주 가까이 본 것도 아니고 저 멀리 보였을 뿐인데 멀리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는 이 도시의 랜드마크는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그림 같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파리 예찬을 하는구나. 이래서 에펠탑 에펠탑 하는 거구나!’




"아니 왜 그림 같지? 배경 그림 같아."


그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A가 나와 감탄사로 통하던 그 순간은 바로 두고두고 남을 추억으로 저장되었다. 그 순간이 소중해진 건 에펠탑이어서, 파리여서, 가 아니라 A와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 이 도시가 처음이라서. 처음으로 보는 장면에 똑같이 감탄할 수 있어서. 그리고 함께 여행했던 친구와 동시에 통할 수 있어서.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파리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마치 첫인상이 그저 그랬던 사람과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처럼. 그러니까 생각도 못했던 이와 사랑에 빠진 느낌이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내게 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때부터 보여주었다. 


아, 파리. 


도도한데 숨겨진 매력을 잔뜩 품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 시크하다. 내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하는 그런 태도. 당신이 나를 어떻게 느끼든 난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당돌함. 첫인상 따위에 공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는 자신만만함. 사랑에 빠질만한 매력이 충분해서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는 건 전혀 부질없다고 말하는듯한 이 도시. 



사랑에 빠진 이들의 귓가엔 늘 멜로디가 맴도는 것처럼 나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따단, 따다단~ 따단, 따다단~. 바로 <미드나잇 인 파리>의 오프닝 ost이었다. 이토록 예쁜 파리와 잘 어울리는 다른 음악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여행이 끝나고 집에 가면 당장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3.


매번 예쁘다고 말하며 그날의 일정을 마친 우리는 숙소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조금 일찍 돌아왔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굉장히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까지 걸어서 20분이라니. 걷는 걸 좋아하는 우리에게, 밤의 루브르를 보러 산책하는 건 필수코스였다.  


와, 밤 산책으로 루브르라니 그리고 와인이라니. 이게 낭만이 아니고 뭐람.


슈퍼마켓에서 와인 한 병을 산 우리는 점원에게 부탁해 깊숙이 박혀있는 코르크를 빼낸 후 와인향이 향긋하게 나는 병을 든 채로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그 상대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듯이 (아니 사랑에 빠지지 않은 상태였어도) 그날 파리의 밤은 낭만적이었다. 




입구를 찾아 돌고 돌다 드디어 루브르 안으로 들어가니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웅장한 입구와 아득한 조명이 만들어낸 그 아늑한 장소에는 꼭 이런 멜로디가 흘러나와야 한다는 듯이, 어디선가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가 들렸다. 입구 쪽에서 두 연주자가 버스킹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곳은 공연장처럼 소리의 울림이 좋았고, 풍성히 울려 퍼지는 두 현악기의 선율은 나와 친구를 단번에 붙잡았다. 우리는 당연히, 아주 당연히, 가던 걸음을 멈추어 소리를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잠깐 음악 좀 들을까?라고 서로 물어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둥에 기대었다. 그러다 걸터앉을만한 곳에 작정하고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우스갯소리로 안주가 음악이라고 말하며 버스킹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느낌이 바로 꿈같다는 건가? 나는 마음이 말랑거렸다. 





익숙한 디즈니의 곡들이 두 현악기로 연주되던 루브르 박물관의 어느 입구에서 그 맑은 음악과 함께 가을바람이 불었다. 내가 정말 파리에 왔구나. 이게 바로 '낭만'이라는 거구나.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핸드폰 노트를 열어 이렇게 썼다.


내 생애 최고로 황홀한 가을밤.

황홀해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

파리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그 영화를 틀었고, 너무다 당연히도 영화는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영화의 오프닝은 나의 첫 파리 여행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처음 보고 감탄했던 에펠탑, 센 강 위의 어느 다리를 걸었던 낭만, 노천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퐁당 오 쇼콜라를 먹었던 밤, 샹젤리제 거리의 어느 디저트 가게에서 사 먹었던 밀푀유, 흐린 날의 갤러리, 그리고 다시 밤의 에펠탑.  


아, 참 좋았지. 너무 좋았지. 


그리고 지금도 나의 첫 파리를 생각하면 그 영화를 재생하듯, 장면과 배경음악이 떠오른다.


따단, 따다단~ 따단, 따다단-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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