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과 기록은 다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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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찾던 오늘 오후, 갑자기 2년 전에 썼던 다이어리를 펼쳐보게 되었다. 이 두툼한 민트색 다이어리를 마지막으로 열어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안 나네. 정말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열어보니 어머, 종이에서 런던의 냄새가 났다. 런던 내 방에서 나던 그 냄새가. 그리고 이 후각적 자극은 순식간에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잠깐 2018년 좀 갔다 오자!'
그래서 아주 잠깐, 나도 모르게 2018년의 런던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2018.06.15
창문 너머로 템즈강과 런던아이가 보인다. 내가 런던이라니!! 꿈에 그리던 영국에 왔다. 얼떨떨한 채로 내려서 입국심사까지 편하게 마치고 공항을 나왔다. 픽업 온 아저씨가 음악을 트셨는데 more than words가 나왔고, 하늘엔 하트 구름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2018.07.02
윔블던 도서관에 가서 회원등록을 하고 이력서를 프린트했다. 책도 빌린 후 도서관을 나와 코스타에 가서 숏 브레드와 커피를 시켜 앉았다. 런던에서 눈이 동그레질만큼 맛있는 커피는 아직 못 마셔본 것 같다. 쇼디치에 가봐야 하는데.
2018.08.06
<Artisan cafe> 면접을 봤다. 면접을 보면서 나 스스로 부족한 점을 많이 발견했다. 비단 영어실력뿐만 아니라 인터뷰에서 어떻게 나를 어필해야 하는지, 인터뷰어가 원하는 답변은 무엇일지, 영어가 부족한 건 어떻게 커버해야 하는지. 리치먼드 공원이 근처여서 생각지도 않게 공원에 왔다. 날도 덥고 공원도 굉장히 커서 걷기 힘들었는데 다행히 초입에서 보고 싶던 사슴을 보았다. 가을이 기대되는 곳이다.
2018.09.04
첫 오픈 출근. 4시 반에 일어나 동트기도 전인 5시에 나와 첫차를 탔다. 색다른 경험이다. 6시에 오픈을 하고 거의 7시부터 손님들이 몰아치듯 들어와 너무 바쁘다. 그래도 마감 때 청소하는 것보단 낫다. 열일 후 퇴근을 해도 오후 1시라니. 카페 직원은 옆 샌드위치 가게에서 공짜로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는데 이거 정말 맛있다. 점심으로 먹은 후, 테스코에 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2018.10.08
조나단과 같이 마감을 했다. 얘랑 같이 일하는 건 그나마 마음이 편하다. 조나단에게 스페인어로 몇 마디 문장을 배웠다. 올라, 그라시아스 같은. 곧 있으면 내 친구 A가 이곳에 오니 나도 그에게 몇 가지 한국어 문장을 알려주었다. [안녕, 오늘 어때?] [너는?] [좋아]. 조나단 덕에 웃었다.
2018.11.18
마지막 가을 같아. 날이 유난히 더 예뻤다. 이런 날 출근이라니. 오늘은 드니스와 같이 마감을 했다. 남자 친구가 와서 조금 신이 난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2018.12.07
일 끝나고 카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오후 4시, 날이 잠시 맑아지길래 얼른 카페 근처 윔블던 파크에 갔다. 잠시 머물러 노을을 감상한 후, gym에 갔다. 오늘은 꽤 집중해서 운동했다. 개운한 몸으로 집으로 귀가. 청소도 밀리고 빨래도 밀리고 글도 밀렸다. 그만 미루고 움직이자.
2018.12.23
런던은 13도. 패딩에 목도리를 두르니 조금 덥다. 이곳의 겨울은 너무 춥지 않아서 딱 좋다. 오랜만에 브릭 레인 마켓에 갔다.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빈티지 액자를 하나 구입하고 베이글 베이크에서 먹고 싶던 것도 사 먹고. 길거리에서 멀드 와인도 한잔 사마셨다.
'탁'
노트를 덮으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나는 지금 우리 집 내방,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있다.
오랜만에 그 시절의 끄적임을 읽고 나니, 열심히 기록 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단 내 워홀뿐이랴. 지나온 시간들마다 해둔 기록들도 모두 다 소중하다. 이게 바로 재산이자 보물이라고. 갑자기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든든? 든든하다는 게 맞는 걸까. 아냐 아냐 정확힌 이거야.
단단해진 느낌이랄까. 뭐랄까,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나 열심히 살았네.
더 열심히 살 수 있겠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덮으면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나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나를 다그치고 비판했던 어떤 사람. 나를 자기 확신의 길에서 자꾸 밀어냈던 사람.
그는 주야장천 일기를 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전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뭘 그렇게 써?"
"일기는 글이 아니잖아."
"일기만 잔뜩 쓰지 말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을 써야지."
물론 그 아픈 피드백 덕분에 나는 내 안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돌이켜보면 저 말들이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나를 위해 쓰는 글은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을 무엇이길래. 그럼 무슨 글이 중요한 거지.
그 사람의 말에 휘둘렸던 나는 그 당시 나의 일기장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왜 나는 자꾸 뒤에 숨어서 나만 보는 글만 쓰는 거야...' 이러면서. 아마 그때부터 일기를 잘 쓰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브런치에 본격적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행히 그 초라함은 사라졌다. 과거의 일들을 글로 쓰기 시작해 지난 일기장을 많이 들춰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오 이렇게도 쓰이는구나 일기가?' 하며 신기해했다.
오늘, 2018년의 일기를 들추어보며, 너무나 반짝이는 보물 같은 기록들을 손에 잔뜩 움켜쥐어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냥 휘갈겨쓴 글씨여도, 몇 번의 퇴고 없이, 망설임 없이 그저 그날의 생각을 쏟아낸 글이어도, 그냥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다는 일과만 쓰여있어도, 아무도 읽지 않아도. 나의 기록은 이 자체로 귀하고 소중하다고. 금세 시간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눈부시게 생생하다고.
죽기 전까지 앞으로 나는 몇 권의 일기장을 더 쓰게 될까? 먼 미래에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재산을 조금 보여주세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한가득 쌓여있는 나의 낡고 헤진 일기장 무더기들을 보여줄 것이다.
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나의 기록을 무시한다면 이제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리고 똑바로 상대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해야지.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내 글과 기록은 다 소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