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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Dec 04. 2020

A short story 1



1.


밤 9시, 겨울이 시작됐다고 알리는듯한 바람이 쌩쌩 부는 저녁과 밤 사이. 카페인지 바인지 정체가 모호한 어느 어둑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 A. 니트와 코트, 그리고 걸쳐있는 목도리의 색의 조합은 누가 봐도 따뜻해 보이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좀 무겁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구석진 자리에 앉아 그는 생각했다. 요즘엔 뭐가 그리 버거운 지 모르겠다며.




혼자 끙끙대기 싫은데 역설적이게도 이럴 때면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그는 어김없이 자기만의 장소에 자신을 두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계획, 나의 관계, 나의 태도, 나의 할 일... 오롯이 '나'로 시작하는 것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건 A에겐 늘 어려운 일이었다. 대신에 그는 더 자유로운 방법을 택했다.



쓰는 것. 이 방법에서는 몇 번의 퇴고도, 고쳐쓰기도, 맞춤법 검사 따위도, 그러니까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나 자신으로만 정직하게 있으면 되니까. 그래서 어쩌면 가장 자유롭지만 가장 괴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고, A는 펜을 든 채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잠도 잘 들지 않으니 커피나 마셔야겠다 싶어 시킨 블랙커피. 그 옆에 놓여있는 심플한 노트와 검은색 펜. 그리고 여러 장의 모서리가 접혀있는 어떤 책. 테이블 위의 그 모습마저도 A스러웠다. 무엇보다 그 테이블과 가까이 있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의 모습이 다 그렇듯.


상념에 젖었다가, 잠깐 그 어떤 책을 읽었다가, 얽힌 실타래를 노트에 한 올 한 올 풀었다가, 생각나는 노래를 들었다가, 그러다 금세 비운 커피 한잔이 아쉬워 와인 한잔을 또 시키는. A는 늘 이랬다. 무언가 좀 무거워 보이는 표정을 지은채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도 모른 채. 그는 그만의 시간 속에, 그 중심에 앉아 늘 그랬다.




"몇 시부터 여기 있던 거야."



문이 열리고 찬 공기와 함께 어떤 남자가 A의 시간 속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 시간의 주인이 놀라지도 않는 건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뜻일 테다. 그러니까 그 남자, A보다 몇살즘 더 많은 B.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마치 약속 장소에 온 것처럼 A의 건너편 의자에 코트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도 어떻게 날 찾아낸 건지. 아, 뭐하냐는 그의 메시지에 내가 어디라고 답을 했지 참.'


 

A가 보기에 B는 뭔가 희한한 사람 같았다. 늘 여유로운 모습이. 어떠한 조급함도, 한치의 예민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모습은 꼭 강물 같다고, A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참 파도가 안치는 거 같아. 신기해. 꽤 넓은 강 같아. 부럽다. 난 맨날 유난스러운데.'


그러고는 왠지 B에게서 느껴지는 찬 공기가 아주 상쾌하다고 느끼던 A였다.   


"에? 뭐야 왜 왔어?"

"뭘 왜와 왜 오긴. 내가 무슨 이유 달고 너한테 오냐."


쟤는 진짜 모른다는 뉘앙스가 소용이 없는 건, A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뉘앙스 따위 풍기지 않아도 B의 얼굴엔 정확하게 쓰여있었다, 오래전부터. 어쩌면 기다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A의 옆자리에 앉은 그는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오빠. 이거 마시면 안 돼?"

"야, 나 마실 거 살 거야. 그거 마시고 싶으면 네가 한잔 더 시켜."

"오호~ 이거 사준다고? 고마워~"

"으휴, 뭐 이거?"

"응."


그는 피식 웃더니 종류가 다른 화이트 와인 두 잔을 시켰다.


"잠깐만 오빠, "

"왜 또~"

"올리브도 사주면 안 돼? 고마워~~"


그러고는 아 죄송한데요,라고 말하며 주문을 더 했다.






2.


B는 멍하니 앉아있는 A를 보고 씩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뭐가 그렇게 답답해서 집에 안 가고 또 이런 곳에 있을까나."

"몰라."

"쟤는 뭐 맨날 모른대. 퇴근하고 피곤하지도 않아? 신기하다 진짜."


A는 남아있던 와인을 다 마셨고, B는 태평스럽게 한마디 더 말을 얹었다.


"모른다고 하는 거보니까 아직 정리 중이구만~"


그런 그의 말에 A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떠한 강요나 질책도, 편견조차 없는 포근함이었다. 그럴 때면 입을 열어 말하는 게 어렵다는 그 여자는, 글을 쓰는 게 오히려 자유롭다는 그 여자는, 그 남자를 마주 보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꼭 누군가에게 늘어놓는 걸 좋아하는 사람처럼.



"응. 여기 몇 시에 왔더라. 여하튼 와서 커피 한잔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래도 머리가 무거워. 그래서 와인 한잔 더 시켰던 참이었어."

"너 밤에 커피 안 마시잖아."

"그냥~ 어차피 잠도 잘 안 오는데 뭐 괜찮아. 오랜만에 밤 커피 한잔 하니까 좋더라."

"그러다 진짜 졸린데 잠 못 들면 어떡할라고."

"몰라. 그러면 뭐 혼자 놀다가 지쳐서 자겠지."



"아니 오빠, 실은 내가 요즘 이거 준비하고 있잖아. 그런데...... "



엉켜있는 실타래를 노트가 아닌 B 앞에 풀어놓는 A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듣는 B, 그리고 그 둘을 에워싸고 있는 따스한 공기. 여자와 남자는 그 순간을 참 좋아했다.




A가 어디선가 혼자서 또 끙끙대고 있으면 늘 B의 메시지가 왔고, 내용은 둘 중 하나였다. 어디야? 아니면 뭐해? 그러면 A는 그 질문에 충실한 대답을 달았다. 나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어. 퇴근하고 잠시 산책 나왔어. 몰라 그냥 있어.



그러고 나면 꼭 둘은 만났다. 동네 카페에서, 회사 근처에서, 어떤 산책길에서, 어딘가에서.

A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딘가에 혼자 처박혀있어도 어떻게든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올 거 같다고. 이상한 믿음이 생길 정도로 정말 그럴 것 같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B는 늘 A에게 왔다. 특히 A가 혼자 상념에 허우적거릴 때면 더더욱.


A는 다 비운 와인잔을 괜히 돌리다가, 그러다가, B를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그 앞엔 잔잔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재잘대다가 잠시 말을 멈춘 A,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 이제는 가만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조금 흔들리는 게 느껴질만큼의 긴장감. 그리고 그 강물 위에는 둥글고 둥글게, 파장이 그려지고 있었다.  



"주문하신 와인이랑 올리브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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