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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Oct 31. 2020

쉽게 포기가 안되던 4점짜리 문제  

런던 살이는 마치 수리영역 고난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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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쉽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나의 성장은 런던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익숙한 곳과 사람들을 떠난 그곳은 내가 자라나기 딱 좋은 장소였으리라.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자라나는 만큼 아팠다. 그래서 나는 그 도시를 마냥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내게 런던 살이는 온도가 명확한 일이었다. 좋을 땐 너무 좋은데 싫을 땐 너무 싫은.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나는 일단 생각을 골똘히 해보는 타입이다. 왜 좋은지, 그리고 왜 싫은지를 두 손에 담아 어느 것이 더 무겁나 무게를 재본다. 그러다 '왜 좋은지'를 담은 손이 더 내려가면 나는 계속 있는 편이다. 싫은 점 때문에 불편할 지라도. 



좋으면 마냥 좋은 건 난이도가 쉬운 문제. 싫기만 한 건 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버리는) 고난도 문제. 나에게 런던 살이는 아주 쉽지도 그렇다고 아주 어렵지도 않은 문제와 같았다. 마치 수리영역에서 풀고 또 풀다 보면 왠지 풀릴 것 같은 4점. 딱 그랬다. 어느 정도의 난이도였냐, 한다면 이참에 나열을 해보려고 한다. 




# 런던에서 워홀을 하며 좋았던 점


1. 자유, 아! 자유, 나의 자유

그곳에서 살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자유'였다. 그리고 그것이 날 설레게 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는 곳에서 나의 과거를 다 잊고 0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건 내가 걸치고 있던 코르셋을 벗는 일과 같았다. 처음엔 불편하지만 어느새 편해지는 것. 나이를 잊어보는 것. 예전의 습관과 흔적을 잊어버리는 것.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만큼 나는 자유로웠고, 그 자유를 느낄 때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숨을 느꼈다. 한 움큼의 새롭고 시원한 공기가 내 콧 속으로 들어오고 나를 굳어가게 했던 것들이 내 입 바깥으로 나오는 일. 숨을 쉬는 자유. 그것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2. 예술과 공원, 고로 영감과 쉼, 그리고 감격

일찍 출퇴근을 하는 날이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는데 바로 갤러리와 공원이었다. 여러 곳의 갤러리와 공원은 내 마음이 쉬고, 에너지를 채우는 공간이었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던 어느 날, 내셔널 갤러리에 갔던 그 날을 기억한다. 피곤에 쩌든 채로 곧장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걸려있는 고흐와 모네의 그림은 나를 조용히 반겼다. 일 끝나고 잠시 들른 갤러리에 고흐의 해바라기와 모네의 수련이 있다니. 내게 주어진 행운이었다. 우습지만 작품에게 인사를 속삭였다. '나 왔어요~'.  그리고 그림을 한참 보다가 중간에 놓여있는 소파에 앉아 잠시 쉬곤 했다. 그림을 멀리 혹은 가까이 감상하며, 작품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 공간의 분위기를 느끼며 그만큼의 영감을 얻어 가곤 했던 날들. 그건 분명 그곳에서 살고 일을 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당연히 매트와 간식거리를 들고 공원에 갔던 날도 기억한다. 매트를 쫙 펴고 그 위에 누운 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멍을 때리기도 하고 쪽잠을 자기도 하다가 자연 안에서 번뜩이는 생각들을 노트에 적기도 하고. 그 시간이야말로 내가 오롯이 충전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과 공원이 가까이 있어서, 그것들을 틈틈이 누릴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3. 사랑해 마지않는 여행

런던을 중심에 두고 이곳저곳으로 여행하는 걸 사랑했다. 그것도 몹시. 평균 10만 원 미만의 왕복 비행기 값이면 주변 유럽 국가의 여러 도시들을 다녀올 수 있던 그 시절. 왕복 3만 원으로 버스를 타고 간 잉글랜드의 매력적인 어느 소도시. 간단히 짐을 챙기고 며칠을 잠시 다녀오던 오슬로 마실. (어쩐지 여행보다 마실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말 그대로 매력적인 기회였고 나는 그 기회들을 티끌 같은 돈을 모아 요긴하게 누렸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던 여행. 컵라면이나 간단 조리식품, 그리고 노트와 카메라가 여행지에서 산 것들과 섞여있던 그 배낭. 떠났던 여행들마다 참 좋았고, 나는 그렇게 여행하는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 시절, 여행은 필수가 되었고 나의 힘겨운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동력이 되었다. 이것 때문이라도 자꾸만 나는 내가 런던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을 최대한으로 꾹꾹 눌러 지내고 싶었다.   








# 런던에서 워홀을 하며 싫었던(힘들었던) 점


1. 노동 그리고 궁핍

나의 노동과 그곳의 사악한 물가는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강도 높은 근무시간은 때때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푹 쉬기도 했으며 때로는 입 밖으로 욕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을 해서 번 돈의 반은 집세로 나갔다. '이게 정말 맞는 일인가?' 의심이 밀물 치듯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마다 고민을 했다. 그리고 항상 '대가 지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에 대한 수업료라고 말이다. 탕, 하고 결론을 내리면 의심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반복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갈등에 나는 늘 선택을 했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오롯이 내 선택이자 내 책임이었다.


그렇지만 노동을 했기 때문에, 궁핍했기 때문에 얻은 것들이 그 전의 글에서도 많이 써놓을 만큼,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니 노동과 궁핍이라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랐고 나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법을, 그 안에서 나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물론 다시는 그렇게 궁핍하고 싶지 않고, 다시 그런 노동을 하고 싶진 않다는 게 솔직함 심정이다.) 







2. 혹독한 겨울 날씨 

이건 뭐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둡고 지독한 겨울 때문에 하루 정도 앓고 끝날 감기를 며칠을 앓기도 했고 며칠이면 앓다가 털어낼 우울감도 더 길게 느꼈다. 그래서 지독했다. 그래도 제대로 겪었던 런던의 겨울 날씨에 처음엔 참패했지만 그다음은 그렇지 않았다.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운동을 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덜 지독해지더라. 


혹독한 겨울 덕분에 얻은 것들도 있었다. 그 어느 곳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 갑자기 찾아오는 햇빛이 소중해서 그때마다 밖으로 나가서 걸었던 산책의 시간, 따뜻한 브랙 퍼스트 티와 달콤한 핫초코. 아이러니하지만 그 매서운 계절이 내게 준 선물들은 참 아늑했다. 






3. 영어와 문화적 한계  

이건 워홀이라기보다 타국살이를 한다면 다들 부딪히는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외국인들과 말이 안 통하고 문화가 달라서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허다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답답했다. 그냥 계속 부딪히고 또 부딪히는 것도 너무 어렵고 힘든 과제여서 그냥 대충 넘어가려던 적도 많았고. 쉽진 않지만 넘지 못할 벽은 아니었는데 그건 모두 내가 만난 친구들 덕분이었다. 언어도 국적도 모든 것을 다 생략하고 친해진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과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를 했다. 영어로 소통하는 것도 쉽지 않고 문화적 차이도 분명 있는데 그들과는 종종 마음이 통한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겸사겸사 영어도 조금씩 늘고 갖고 있던 편견들도 어느새 사라지는 걸 나는 느꼈다. 언어나 문화 차이 모두 분명히 한계지만 부딪혀볼 만한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써보니 내가 기간을 꽉 채워서 그곳에 머물다 온 이유가 명확히 보인다. 좋은 점과 싫은 점을 저울질했을 때 좋은 점이 더 무거워서 선택을 했던 건데. 돌이켜보니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것에서 나는 배우고 자라나서, 그게 너무 좋아서 머물던 것이었다. 


그곳에서 산다는 건, 빈 연습장을 펼쳐 풀고 또 풀어 보는 것과 같았다. 헤매기도 해 보고 틀리기도 해 보고 그러다 다시 풀어보고. 결국엔 그 문제가 풀린다. 오호? 할만하네? 재밌다. 재미가 들면 그때부터 수월해지는 건 금방이다. 매번 풀 때마다 힘들고 어려웠던 런던 살이는 어느새 또 풀고 싶은 매력적인 4점짜리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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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어렵고 쓰디쓴 만큼 가치 있다. 나의 성장은 런던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익숙한 곳과 사람들을 떠난 그곳에서 나는 내가 원하던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자랐다. 내가 자라나는 흔적에는 땀과 눈물이 묻어있지만 그 모양이 점점 마음에 들었고, 어느새 나는 그 성장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이 지금은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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