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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Apr 15. 2019

영국 배경 영화 발자취 따라가기 #02 <Man-up>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런던 시내.


영화는 낸시(Lake Bell) 지인의 약혼 파티에서 시작된다. 34살 싱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두근대는 설렘을 시작하는 것도 귀찮아지는 그런 나이. 냉소적이며 시니컬한. 어딘가 나와 닮아보이는 그런 모습에서 영화의 시작이 일단 좋았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이런 여주인공의 내숭없는 성격 때문인지 영화의 원제는 남자답게 행동하고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의 'Man Up'인데 개인적으로 한국 제목이 구미를 더 당기는 것 같다.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이라니. 그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런던에는 누구나 알만한 시계탑이 있나? 하는 그런 유치하지만 사소한 궁금중들을 자아내는 제목.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런던의 서남(South West)쪽이라서 그런지 영화 스토리의 또 다른 시작을 나타내는 주요 장소인 Southern West Rail(서남행 기차)과 워털루 역이 등장하니 익숙해서 반가웠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눈과 발을 바삐 움직이는 이 장소에서 로맨틱한 일이 일어났다라니 과연 그 확률이 정말 어느정도일까?를 계속 되새기게 만든다. 자주 지나가던 클람프 정션(Clapham Junction)역도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쯤에 안내 방송으로 등장했다. 토익에서 줄기차게 듣던 기계적 결함(due to technical issue)으로 인해 클람프 정션은 정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South Western Railway의 실사!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 연사를 맡은 기자, 낸시는 부모님 집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이리저리 끄적인다. 끄적이다 '검정 바지 빨기', '허벅지 튼튼하게 만들기'등의 to-do list를 만드는 길로 샌다. 마중편에 앉아있는 쾌활한 젊은 20대 초반의 여자는 그런 낸시를 혀를 쯜쯜 차며 한심하게 쳐다본다. 'Six Billion People and You(60억 인구와 당신)'이라는 베스트 셀러 자기 개발서를 읽으며 자신감에 가득차 있는 매사에 긍정적일 것 같은 성격으로 비춰지는 낸시와는 정반대되는 그런 캐릭터, 제시카는 소개팅남을 만나러 워털루에 가는 길이다. 세상에 아직 찌들지 않는 어린 소녀는 낸시에게 말한다. 비관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의 삶을 한 단계 희망적으로 고양시켜줄 이 책을 당신에게 소개합니다라고. 허상 속에서 꿈틀거리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느껴지는 단어와 문장들이 가득차 있는 그런 책을 낸시는 거절한다. 그래도 기자인데 나름 '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지 않겠는가. 비관적인 낸시의 행동에 제시카는 책에 나와있는 챕터(Your negative thoughts are ruinning your life and everyone else's - 당신의 비관적인 행동이 남의 인생까지 망친다)를 북마크로 표시하고 낸시에게 두고 내린다.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에너지고 피곤한 낸시는 그새 잠이 들어버렸다. 침까지 흘리며... 


기차에서 내려 제시카를 찾으러 가는 길에 비춰진 승강장 5번과 6번


그러다 잠에서 깼는데 요 요망한 것이 놓고 간 베스트 셀러 책을 발견한다. 약 올린 그녀를 잡기 위해 제시카는 워털루 플랫폼 5번과 6번 사이에 정차한 기차에서 내려 찾으러 따라 나선다. 내가 살고 있는 남서쪽에서 워털루 기차행을 타고 내리면 보통 플랫폼 19번에서 내리게 되는데, 옆 플랫폼 승강장에서 영화 촬영이 이루어졌을 생각에 이 장소가 조금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조용해보이지만 실제론 분주했던 WHSmith


소개팅녀가 소개팅남과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매개체로 '책'을 골랐는데, 낸시에게 버리고 내렸으니 또 다른 책이 필요한 소개팅녀는 책을 다시 사기 위해 WHS로 들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WHS는 매장 입구 앞에 책 베스트셀러 'Six Billion People and You(60억 인구와 당신)'로 가득찬 책 가판대가 놓여있다. 직접 방문한 워털루역의  WHS 앞엔 다른 지하철 라인으로 갈아타거나 기차를 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영화 제목 속의 주인공, 런던 시계탑!


소개팅녀를 쫓아가던 낸시는 얼떨결에 소개팅 장소였던 워털루 역 시계탑 밑에서 그 책을 들고 서있게 되버린다. 허둥지둥하던 사이 소개팅남이 도착해 낸시를 제시카로 착각하고 말을 건넨다. 

"Hello~"

굳이 소개팅녀인척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를 한 방 먹인게 괘씸했는지 낸시는 소개팅녀인 척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렇게 영화적인 첫 만남이 성사된다. 

워털루역 중앙 천장에 위치한 4면이 시계로 구성된 이 시계는 빅토리안 아치(Victorian Arch) 형태로 유명하며, 1차 세계 대전 중에 죽은 철도 직원들을 기리기 위해 지워졌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없지만 1920년대에 지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계의 지름이 약 170cm라고 하니 볼 때마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괜히 걱정되고 위협스럽다고 생각됐던 이유가 괜히 있었던 게 아니였다! 


워털루 역을 지나갈 때면 나도 항상 바쁘게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번 영화의 주제글로 답사를 한다고 사진을 찍으면서 조금 더 시간을 가져봤지만 나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세인트 판크라스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다른 유럽으로 이동을 하지만, 시초의 터미널은 워털루 역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들, 가족들이 많이 보이기도 하는 장소이다. 


'Hungerford Bridge'를 기점으로 걸어가며 얘기를 나누는 주인공들


워털루 역을 나와 조금 걷다보면 SouthBank쪽으로 갈 수 있는 헝거포드 다리(Hungerford Bridge)가 있다. 이 다리를 기점으로 SouthBank Arts Complex까지 걸어가며 잭과 낸시는 서로의 직업을 교환하며 아래와 같이 쿵짝이 맞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Jack: Is that quite stressful?

도시에서 일하는 거 꽤 스트레스 받겠어요?

Nancy: Nah! Lunch is for wimps! 

아니에요. 점심은 겁쟁이들을 위한 것!

Jack: 'If you need a friend, get a dog.' Wall Street. Great movie.

'친구가 필요하다면, 강아지를 얻어라.' <월 스트리트>. 좋은 영화죠. 


템즈강을 따라 건물이나 전등에 서서히 불이 들어온다


낭만적인 템즈강을 옆에 끼고, 문화적인 교류가 잘 맞는 사람과 첫 만남에 좋은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느슨하게 늘어져있던 감정에 간만에 긴장감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영화속 주인공들이 걷던 시기도 털모자에, 장갑에, 꽤나 추운 겨울이었을 텐데, 내가 걸을 때도 템즈강 바람때문에 너무나 추워서 고독하기만 했을 뿐이다. 


유람선이나 보트를 탈 수 있는 Festival Pier
관광객들이 템즈강을 배경으로 사진찍기도 하는 곳인 Canary Yellow Steps

Festival Pier 부근에 위치한 Canary yellow steps에서 잭과 낸시는 각자 연애사의 스펙트럼, 이혼 등을 얘기하며 'Fuck the past'라는 '60억 인구와 당신'속 책 구절로 대동단결된다. 3종 철인경기를 취미로 하는 24세가 자신(낸시)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대화도 이 곳에서 이루어진다. 


해가 지고 런던 시내의 야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쯤이라서 그런지 낭만이 느껴지는 발자취었다. 영화처럼, 워털루 시계 탑 밑에서 만나 템즈강을 따라 걸어가며 말이 통하는 상대를 알아가는 기분을 느껴본다면 엄청 짜릿할 것 같다. 그 뒤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데킬라샷으로 함께 추운 저녁을 밤새도록 보내고 아무 생각없이 새벽까지 즐기며 헤어지는 그런 만남일지라도. 


Abstract Stainless Steel Sculpture
Queen Elizabth Hall Terrae에 위치한 강철 조각상과 런던아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잭과 원래 소개팅녀였던 제시카와의 만남이 'Queen Elizabeth Hall Terrace'에 있는 요상한 조각상 뒤에서 이루어진다.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낸시와는 통했던 문화적 교류나 대화들이 안 통하니 답답함을 느끼고 낸시에게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잭의 모습이 그려지는 장면이었다. 


실제로도 사람들이 테라스 밖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근처에 공연장도 있고, 갤러리도 있고 하니 여유롭게 런던야경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외에도 영화 속에 나온 촬영지로 나왔던 펍이나 낸시 부모님의 하우스도 찾아가보고 싶었는데, 다 찾아갈 여력이 안됐다. 영화 속 촬영지를 욕심 같아선 다 찾아서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지만, 뚜벅이로 한정된 시간에 이 모든 걸 하기엔 시간이 역부족이라는 걸 항상 깨닫는다. 그래도 이렇게 실제 영국 영화의 배경지를 조금이나마 훑어보고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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