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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Mar 15. 2020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불안에 떠는 10대들에게 힘이 되는 음악적 영혼의 존재, 에테르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울한 영화'를 생각할 때, 항상 순위에서 빠지지 않고 생각나는 영화 중 하나인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이제야 보게 됐다. 개봉 연도가 2001년이다. 약 20년 전에 나온 영화를 이제야 보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와이 슌지 영화 중 최고라고 꼽는다. 영화 속 힘듦이 나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아님 그 시기를 이미 예전에 지나와서 그런지 나는 흔쾌히 동의를 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나의 평이었다. 


뿌연 안갯속 사이,  맘에 드는 앨범 Erotic 포스터 등에 매고 자전거 타기

한동안 안 보던 일본 영화를 오랜만에 보니 잔잔하고 느긋하게 느껴지는 감성에 곧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자그마한 스크린 속을 뚫고 은은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장면들과 귀를 즐겁게 하는 피아노 선율이 잊고 있었던 옛날 중학교 시절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나에겐 우울한 느낌의 영화보단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추억의 촉매제 역할을 해주는 영화처럼 다가왔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영화 속, 마음에 드는 장면을 직접 그려봤다.


많은 영화를 깊게 봐온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형제, 자매 없이 누구 하나 말할 상대 없이 나 혼자 오롯이 나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유년 시절, 영화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당시엔 그것들이 문제인지도 몰랐고,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털어놔야 하는지도 몰랐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길 잃은 어린양처럼 저마다 현 상황에서 힘든 고민들을 끌어안으며 릴리 슈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런 면에서 이해가 많이 되고 공감됐다. 


그래서인지 그게 영화가 됐든, 음악이 됐든, 드라마가 됐든 문화가 주는 힘이 대단하고 믿는 힘은 어려서부터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선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행복을 전달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참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어려서 일본 문화의 힘이 강하다고 느끼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이후엔 팝이나 할리우드가 막강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한국 문화의 콘텐츠도 날로 발전해왔다. 몇 년 전부터 유행이 시작됐던 한류의 힘은 영화 <기생충>, 음악 BTS, 스포츠를 통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문화' 자체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긍정적인 파워가 너무 좋다. 


이 친구들에게도 릴리의 존재는 그럴 것이다. 


총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츠다(아오이 유우)라는 주인공을 제외한 세 명이 가상 속의 인물인 '릴리 슈슈'에게 의지하고 힘을 얻어가며 살아간다. 한 번도 미디어에서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오로지 목소리에서 음악의 힘으로만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 릴리 슈슈.


릴리 슈슈를 위해 모인 온라인 공간에서, 상처 받은 영혼들은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상처 받은 영혼들은 위로를 받기 위한 오프라인 장소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릴리 슈슈의 에테르를 모욕하지 말라며 싸우는 등의 아이러니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 사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모순의 덩어리로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에테르'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에테르(Ether)는 두 개의 탄화수소기가 결합된 유기 화합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화학·물리적인 단어였다. 영화에 나오는 느낌으로 따져봤을 땐, 릴리 슈슈가 가지고 있는 맑고 깨끗한 대기와 같은 순수한 영혼을 뜻하는 느낌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신 같은 존재에게 의지해야 하는 그들의 사연에 마음 아픈 장면들이 있었다. 


호시노(오시나리 슈고)가 하스미(이치하라 하야토)에게 콜라 셔틀 시켜놓고, 그의 릴리 슈슈 라이브 티켓을 고깃 고깃 구겨 집어던져 콘서트장에 입장하지 못하게 했을 때. 시간을 그 이전으로 돌려본다면, 검도부에 들어가서 친해졌다가 섬 여행을 다녀오고 호시노가 하스미를 괴롭히면서 새로 나온 릴리 슈슈의 CD를 두 동강으로 조각내는 순간. 릴리 슈슈의 에테르를 더럽혀선 안돼라고 말하는 커뮤니티에서, 호시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순수한 영혼에 어긋나는 더러운 일을 현실에서 계속해서 자행했을까? 영화를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제일 이해가 되지 않고 행동의 개연성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가 없는 캐릭터였다. 자신이 좋아했던 첫사랑도 괴롭히는 친구를 통해 강간시키게 만들고 어떤 계기가 그를 악마로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유추를 해본다면, 아버지의 부재가 있지만 부유한 환경에서 친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주고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의를 베푸는 그런 엄마의 행동에도 평소에 불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자신을 위한 부모의 행동이 친구들 사이에선 왠지 더 놀림감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쎄 보이고 싶은 그의 캐릭터에 연약함을 더해주는 마마보이 같은 캐릭터를 더하게 하는 요소랄까? 게다가 경제적으로 운영하던 공장이 부도가 나면서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검도부 친구들과 오키나와 섬으로 여행을 가서 경험하게 됐던 직·간접적인 죽음의 순간. 섬으로 여행을 왔던 여행자 남자의 죽음 앞에서, 차로 친 피의자는 계속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만 내뱉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허망한 현세의 삶에서 나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방법을 몰라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짓밟는 방식으로 그 위에 올라가서 강해 보이는 잘못된 방식을 택한 걸까?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연

츠다는 우연히 연 날리기 하는 남자 무리를 본다. 팔을 쭉 뻗어 연을 잡아당기며 직접 연 날리기를 해보던 츠다는 하늘 위에서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잠깐의 자유를 맛 본 후, 자살을 한다. 토베나이 츠바사의 '날 수 없는 날개'(Tobenai-Tsubasa)가 OST로 흘러나왔다. 


연들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츠다


해맑게 웃는 그녀의 웃음 뒤, 같은 반 학생에게 책 잡혀 원조교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 장면은 이미지, 스토리, 음악적인 부분에서 삼박자가 고르게 슬프게 다가왔다.  


반 여학생들에게 왕따, 강간을 당했던 쿠노(이토 아유미)는 현실적인 강인함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녀는 묵묵히 피아노를 친다. 음악을 통해 자신도 치유받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하스미에게도 용서의 기회를 주려는 느낌을 준다. 


릴리 슈슈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있는 날. 하스미는 호시노를 죽였다. 릴리 슈슈의 팬들은 그녀의 에테르를 더럽힌 사람을 못 찾았다며, 불순한 일이 일어난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그녀가 있다고 욕을 한다. 하스미는 순수하고 깨끗함의 결정체, 에테르=릴리 슈슈를 욕보이게 한 장본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라이브 콘서트. 내 외로운 영혼에 위안과 위로를 얻고 싶었던 현장이 자신으로 인해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좌절해서 잠시 나도 이 생을 뜰까 생각도 했겠지만, 하스미는 현실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또 다른 친구의 모습과 음악을 통해 살아가는 힘과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우울한 영화라기 보단, 방황하는 10대 청소년들에게 힘과 위안이 되어주는 존재가 무엇인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긍정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 나오는 드뷔시(달빛, 아라베스크), Salyu(Glide), I see you, you see me 등 좋은 노래가 많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영화 음악을 들으며 영화의 여운과 함께 영화 속 장면들을 함께 떠올려봐도 좋을 것 같다.   



* 사족 1

Salyu의 '회복하는 상처'(Kaifuku suru Kizu)라는 노래는 타란티노 영화 <킬빌 1>의 OST로도 등장했다.  

우마 서먼이 나중에 싸우는 용도로 일본 검을 소개받는 장면에서 나왔다. 


* 사족 2

쿠노 피아노 못 치게 안 하면, 노래 안 부른다고 괴롭히던 여학생들 제재 못하는 남선생이나, 집단 따돌림에 대처하지 못하는 여선생이나 답답해서 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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